고승범 금융위원장이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인 4~5%대는 성장률, 물가 등 실물 경제와 금융시장 동향을 보면서 탄력적으로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올해 금융권에서 발생했던 연쇄 대출 중단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당초 공언했던 가계부채 관리 수준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가계부채 관리 목표가 연이어 후퇴하고 규제 내용도 자주 바뀌어 대출자와 시장에 혼선을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각에선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강경했던 가계부채 규제 분위기가 완화 기조로 전환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고 위원장은 지난 3일 비대면 기자간담회를 열어 "가계부채 관리는 당장 인기가 없지만 과단성 있게 추진해야만 한다"며 "올해 하반기부터 가계부채 총량 규제를 강력하게 시행하면서 지난 7월 10%였던 가계부채 증가율은 지난달 7.7%로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고 위원장이 지난 8월 말 취임한 이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가계부채 관리는 지표만 보면 선방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권 대출 한도가 인위적으로 제한받으면서 대출 중단이 벌어지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고 위원장이 총량 규제 완화를 시사한 배경이다.
고 위원장은 구체적인 총량 규제 완화 수단으로 "중·저신용자, 정책서민금융 상품은 총량 관리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민 대출은 가계부채 규모와 무관하게 중단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대출을 총량 규제에 포함하면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 4~5%대는 달성이 어려울 수 있다.
금융권에선 서민 대출을 보호하겠다는 고 위원장 발언 취지에는 공감하나, 가계부채 규제가 자주 바뀌어 혼선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우선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만 봐도 금융위는 4월 4%대로 제시했다가 10월 4~5%대로 후퇴한 데 이어 이날 한발 더 물러섰다.
가계부채 규제 대상을 결정짓는 과정에서 시장에 혼란을 주기도 했다. 금융위는 지난 10월 전세대출을 내년 1월부터 6개월 앞당겨 시행하는 차주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 포함할 가능성을 언급했다가 최종적으로 뺐다.
일각에선 고 위원장의 이날 발언을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인기 없는 정책인 가계부채 규제를 적당히 관리하려는 '신호'로 읽기도 한다. 중·저신용자, 보금자리론 등 정책서민금융 상품 대출을 총량 규제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가계부채 확대를 감내하고, 서민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총량 규제를 밀어붙이다 보니 금융당국 스텝이 계속 꼬이고 있다"며 "가계부채 규모에 따라 당국의 규제 강도가 바뀔 순 있지만 최근에는 변화가 너무 잦고 그 피해는 결국 차주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 위원장은 총량 규제로 금융권이 대출 금리를 높이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지적에는 "금융당국은 대출 금리가 빠르게 오른 시기를 중심으로 은행 예대금리 산정체계를 점검 중"이라며 "지난달 25일 기준금리 인상 후 주요 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높여 이달부터 예대금리 차는 축소할 전망"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