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처럼 올곧고 깨끗하게, 베풀며 살고 싶을 뿐"

입력
2021.12.11 10:20
장욱 전 군위 군수 
건설업 하던 시절 "믿고 맡길 수 있는 회사" 정평 
반듯하고 사려깊었던 어머니 떠올리며 군정 
"언젠가 내가 가진 것들 사회에 돌려줄 것"



"사장님, 저 더이상 일 못 하겠습니다."

현장 소장이 사장에게 사표를 들고 왔다. "공사가 너무 팍팍해서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더니 급기야 사표 시위에까지 나선 것이었다.

"고작 지방 하천에 놓는 교량을 이렇게 까다롭게 공사하는 곳이 어디있습니까. 고속도로 교량도 여기보다 더 허술하게 하는 데가 많습니다."

사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설렁설렁, 대충 대충은 그와 맞지 않았다. 그렇게 하느니 안 하는 게 맞다는 것이 사장의 신념이었다. 돈을 아껴가면서 기준만 높인 것이 아니었다. 충분한 공사비를 투입했다. 사장은 "더 잘하는 곳과 비교해야지, 왜 대강대강 하는 곳과 비교하느냐"면서 "일을 그만뒀으면 그만뒀지 기준을 낮추진 못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장욱(67) 전 군수가 건설업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 전 군수가 그렇게 철두철미한 태도로 공사를 진행하자 군청에서 감독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장욱은 안 가봐도 믿을 수 있다"는 거였다. 감독을 요청한 것은 오히려 장 전 군수 쪽이었다.

"여느 공사장에는 감독이 오는 걸 꺼렸지만 저는 오히려 기다렸습니다. 현장 상황에 맞춰 기존 계획을 변경해야 할 일이 종종 있었거든요. 원활한 소통을 위해 제가 와달라고 요청한 적이 많았습니다."

건설업은 큰형님에게 배웠다. 18살 차이가 났던 큰형님은 건강상의 문제로 비교적 일찍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2년에 형님의 뒤를 이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활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들 사이에 "장욱이 맡은 곳은 감독도 필요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23개 시군에서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2000년 즈음에 연매출 100억을 돌파했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도 반듯한 모습만 보이신 어머니

장 전 군수의 사업 스타일은 어머니의 성격을 빼닮았다. 당신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에 항상 경우 바른 분이었다. 장 전 군수는 "사업을 했더라면 남자 못잖았을 것"이라면서 1960년대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마을은 씨족들끼리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는데 어머니는 늘 중립을 지켰다. 한번은 뒷집에 살던 집안사람이 경북도청에 전기를 넣어달라는 요청을 하러 갔다. 그때 어머니는 여비를 쥐어주면서 "마을에 전기를 넣는데 성공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비용을 추렴해서 나에게 돌려주고, 전기 공급이 실패하면 그냥 내 돈을 희사한 것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장 전 군수는 "어머니는 배포도 컸을뿐더러 무슨 일이든 사리에 맞게 군말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정확하게 처리했다"면서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늘 어머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자식들에게는 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장 전 군수가 군위로 내려가겠다고 연락을 하면 깨끗하게 몸을 단장하고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도 아프신 줄 몰랐다. 장 전 군수는 "자식들에게도 늘 반듯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셨다"면서 "병명이 심근경색이었는데, 병원 한번 못 모시고 간 것이 지금도 아쉽다"고 덧붙였다.

장욱 전 군수의 신념과 올곧음에 바탕을 만든 것이 어머니의 모범과 가르침이었다면 근력을 길러준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해병대다. '내가 해병대를 잘 갔다왔구나' 하고 느낀 시간이 있었다. 1991년 1월, 교통사고가 났다. 군위에서 대구로 가던 중에 졸음운전으로 트럭과 정면 충돌을 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쓰러졌는데 깨어나 보니 손이 묶인 채로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죽고 싶을 만큼 격렬한 갈증을 견디면서 '내가 해병대를 안 갔다 왔으면 이만한 참을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에 유학 간 아들을 불러서 군대에 보냈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면제로 넘어갈 상황이었지만, 제가 설득을 해서 병역을 필하도록 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군대에서 배우는 게 훨씬 크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제가 몸소 체험했으니까요."

2010년 "신뢰받는 군수가 되자는 일념"

그는 정치 인생에서도 나름의 굴곡을 겪었다. 1994년에 첫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이번엔 차가 아니라 정치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검찰에 입건됐다. 검찰은 뇌물이 오간 정황을 찾았다. 9일 동안 밤낮 없이 조사가 이어졌다. 소소한 안부 전화까지 물고 늘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 세력들이 일으킨 농간이었다. 장 전 군수만 잡아넣으면 중요 후보 한명을 주저앉힐 수 있다는 판단에서 '묻지 마 고소'를 한 것이었다.

"탈탈 털다가 애초의 혐의와 상관 없는 것까지 조사하더군요. 지금이라면 당장 반발했겠지만,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2002년 도의원에 당선됐다. 이때의 활약으로 지역 정치계에서 인지도를 많이 쌓았다. 특히 도정질문에 나설 때마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주목을 받았다. 나중에는 도청에서 '선제적 대응'을 했다. 행점감사를 앞두고 군위 출신 인사들이 집으로 찾아와 "이 질문 빼달라" "저 질문 빼달라" 하고 간곡하게 요청했던 것. 급기야 도정질문을 앞둔 즈음에는 지인의 집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2010년에 군민들의 여망에 힘입어 군위 군수에 당선됐다. 공천 직전까지도 군수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공천을 받고 나서야 선거 운동에 들어갔다. 선거 운동이라기보다는 이미 예정된 수순을 밟듯 평소 그를 믿고 따르던 이들의 응원으로 거짓말처럼 군수에 당선됐다. 그는 군수 직무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마음에 새겼다.

첫째는 화합이었다. 민심이 안정되려면 선거로 양분되어 있는 군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공정하게 업무를 진행하고 인사를 펼쳐나가면 언젠가는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질 것이란 확신으로 군정을 펼쳐나갔다.

두 번째는 공무원과 주민 모두에게 신뢰받는 군수가 되자는 결심이었다. 한평생 올곧게 살아가신 어머니처럼 매사를 한점 부끄럼 없이 반듯하게 처리해나가자는 결심이었다.

"군위에서는 사업가로서, 또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뭐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나를 키워준 고향과 고향민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구질구질한 구석 없이 깨끗하고 바르게 처리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모님 본받아 올곧게, 또 베풀며 살아가고파

성공한 사업가에서 도의원에 군수까지 나름의 성취는 이루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한 건 아니다. 더 베풀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만 해도 군위에서 교육발전기금과 불우이웃돕기 기금을 가장 많이 낸 인물 중의 한명이지만 아직 성에 덜 찬다고 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명절 때만 되면 이웃 어르신들에게 명태나 김, 멸치 같은 선물을 돌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른이 되면 사업가가 되어서 두루 베풀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은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행보를 놓지 않고 있는 까닭에 주변에 함부로 베풀기도 힘들다. 장 전 군수는 "벌어놓은 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면서 "언젠가는 내가 가진 것들을 다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탑리에 가면 면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세워준 공덕비가 있습니다. 항상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하신 어머니처럼, 또 늘 주변과 나누면서 살다가신 아버지처럼 남은 생을 두루 베풀며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삶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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