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미국. 이혼과 해고로 나락에 떨어진 자동차 외판원 데니스 호프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떠올렸다. 바로 주인이 없는 달의 땅을 파는 것. 호프는 달 대사관이란 뜻의 '루나 엠버시(Lunar Embassy)'를 설립해 달 땅 1에이커(4,000㎡)를 24.99달러(약 3만 원)에 팔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달의 땅을 산 사람만 600만 명, 호프가 벌어들인 수익은 1,000만 달러(약 12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봉이 김선달'이 있었다면 미국에는 데니스 호프가 있는 셈이다.
올해 '메타버스(Metaverse)' 유행을 타고 또 다른 루나 엠버시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가상의 땅을 현실의 부동산처럼 판매하는 '가상부동산 플랫폼'이다.
1일 금융·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가상부동산 거래 플랫폼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해 11월 론칭한 호주의 '어스2(Earth2)'를 비롯해 온라인 게임에서 출발한 '더 샌드박스(the Sandbox)', 현실 주소를 기반으로 한 가상부동산 거래소 '업랜드(Upland)' 등이다.
가상부동산 플랫폼은 말 그대로 가상공간의 토지를 사고파는 시장을 뜻한다. 지구를 동일한 크기로 본떠 만든 현실 세계의 땅을 팔거나(어스2),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의 땅에 가격을 매겨 판매하는 등(디센트럴랜드) 방식도 다양하다. 거래 과정에 대체불가능토큰(NFT)을 도입하기도 한다. 가상부동산에는 실제 부동산처럼 등기권리증 등 소유권을 증명할 문서가 없기 때문에 이를 복제가 불가능한 NFT로 대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입한 가상부동산은 향후 메타버스로 구현되는 가상현실을 통해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가령 아바타들이 모여드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거대한 전광판을 만들어 광고비를 받거나, 홍대 놀이터를 이벤트 개최자에게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식이다. 서울 강남에 아바타들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분양해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다.
국내에도 가상부동산 플랫폼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사전신청을 받기 시작한 '세컨서울'은 이날 기준 21만9,000명이 몰렸다. 올해 들어 국내 최초 가상부동산 플랫폼을 표방한 '메타렉스', 어스2와 유사한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메타버스2' 등이 서비스를 공개했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메타버스 시장 확대에 따라 가상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지고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가상부동산 매입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국내 플랫폼 메타버스2에서 가상의 토지를 직접 구매해 봤다.
회원 가입 후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쳐 계좌이체를 통해 가상의 계좌에 입금을 하면 해당 액수로 원하는 지역의 토지를 매입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꿈도 못 꾸는 서울의 초고가 아파트인 용산구 '한남더힐'을 사보기로 했다.
한남더힐 일대의 타일(10×10㎡)당 가격대는 100~500달러(약 12만~60만 원)였다. 매물 중에서 가장 저렴한 102달러(약 12만 원)짜리 자투리 땅을 매입했다. '토지를 구매하셨습니다' 안내 팝업이 떴다. 바뀐 것이라고는 매입한 타일의 표시가 이전 토지주의 국적인 미국 성조기에서 '태극기'로 변한 정도다. 거래 이외에 건물 건설이나 3D 가상현실 등 다른 기능은 아직 구현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유하게 된 토지는 언제든지 매매가 가능하다. 다만 매입 시와 달리 팔 때는 5%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메타버스2 이외의 다른 플랫폼에서도 거래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어스2에 따르면 세계적인 관광지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높은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미국 뉴욕의 자유의여신상은 한국 국적 이용자의 소유다. 현 시세가 4,593달러(면적 7,200㎡), 우리 돈으로 약 541만 원이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1,617달러), 영국 런던 빅 벤(3,568달러) 등도 10×10㎡ 타일당 가격이 8~15달러에 형성돼 있다. 서비스 초기 당시 가격(0.1달러)에서 100배 이상 뛴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국내 가상부동산도 인기가 많다. 광화문과 강남역 등 번화가를 비롯해 '강남3구' 등 현실에서 땅값이 높은 지역은 가상부동산 가격도 덩달아 높았다. 타일당 가격이 30~40달러(약 5만 원) 수준이다. 반대로 강원 홍천군의 산간 지역은 0.1달러의 가격에도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빈 땅이 수두룩했다.
가상부동산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막무가내식' 투자에 대해 경고한다. 특히 국내 플랫폼의 경우 향후 제공 서비스나 운영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곳이 태반인 데다 입출금 절차가 까다로워 현금화 가능한 안전한 자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상부동산은 '한국인만의 열풍'이라는 지적도 있다. 어스2에 따르면 국가별 이용자의 자산 규모 중 한국 이용자의 자산은 이날 기준 1,063만748달러(약 125억 원)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디센트럴랜드가 지난 9월 한 달간 확보한 한국인 사용자는 7,067명으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가상부동산은 '제2의 비트코인'을 노리고 투자에 나선 국내 이용자가 대부분이라 전체 수요는 제한적"이라며 "특히 현재 형성된 가격은 호기심과 기대에 의한 것이고 투기 세력 유입 가능성도 존재하는 등 위험성이 큰 시장"이라고 경고했다.
희소성을 기반으로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비트코인과 달리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가상부동산은 '승자 독식'의 플랫폼 비즈니스라 투자를 할 때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는 의미다. 김승주 교수는 "수많은 지식서비스 중 생존한 네이버의 '지식인'처럼 이용자가 많은 가상부동산 플랫폼은 살아남고, 이용자가 없는 곳은 사라질 것"이라며 "플랫폼이 사라지면 자산이 사라지는 만큼 선택에 있어서도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