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떼다 날 샐 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12년 묵히고 또 해 넘기나

입력
2021.11.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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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국회 처리 불투명
민형배·김희곤·윤주경·권은희 의원 반대
"보험금 미청구 현실 해결에 힘 모아야"

#. 30대 직장인 신모씨는 발목골절 수술을 받았던 4년 전을 떠올리면 배가 아프다. 당시 병원에서 진단서, 영수증 등 서류만 50장 넘게 발급받아 일일이 사진을 찍어 보험사 홈페이지에 접수했다. 다만 바쁜 회사 일로 실손보험금 청구 기간을 넘긴 탓에 결국 보험금 150만 원은 받을 수 없었다. 신씨는 "보험금 청구가 너무 불편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 70대 박모씨는 병원에 갈 때마다 따로 사는 자녀 눈치를 본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홈페이지 등을 통한 실손보험금 청구를 매번 부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신청하려고 보험금 청구 서류를 진료 항목별로 모아 놓는데, 빠진 건 없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4,000만 명 가까운 가입자가 지나치게 복잡한 청구 절차 때문에 불편을 겪으며 여전히 상당액의 실손보험금을 포기하고 있지만, 제도 개선의 키를 쥔 국회는 올해도 어물쩍 넘어갈 태세다.

소비자단체는 물론, 보험사와 정부까지 한목소리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청구 간소화) 제도 도입을 요청한 지 벌써 12년째. 하지만 강력한 이해집단인 의료계의 눈치를 보느라, 일부 국회의원들이 국민 대다수의 편의는 외면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도 해 넘길 판… 의료계 반대가 결정적

22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23일 청구 간소화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을 심사할 예정이다. 다음 달 정기국회 종료를 앞둔 사실상 마지막 법안 심의지만 올해도 통과 전망은 어둡다.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소비자 불편을 줄이기 위해 청구 간소화 도입을 권고했다. 이후 보험업계는 물론 정부, 소비자단체까지 한목소리로 청구 간소화를 요청해 왔지만,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의료계의 반발이 여전해서다.

지난 9월 28일 열린 정무위 법안소위 속기록을 보면 의료계의 강한 입김을 엿볼 수 있다. 최대 쟁점은 청구 간소화가 의료계 먹거리인 비급여 통제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청구 간소화 법안은 병원이 의료 정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을 거쳐 보험사에 보내는 형태다. 의료계는 병원이 재량으로 정할 수 있는 비급여 수가 자료가 심평원에 쌓이면 가격이 표준화되고 결국 비싼 값을 받지 못하게 될 걸 우려한다. 급여 진료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비급여 진료로 메우고 있는 병원 수익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청구 간소화로 보험사가 환자 진료 정보를 더 많이 보유하게 돼, 보험 상품 설계 등 영리 목적에 악용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보험사가 꼭 보험금 청구에 필요하지 않은 자료(영상기록지 등)를 추가로 요청해도 지금은 환자가 알아서 거부할 수 있지만 청구 간소화가 되면 병원이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무위 법안소위에서 "의료계가 심평원을 거부하는데 대안 필요"(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비급여 관련 정책이 민간에 넘어간다"(권은희 국민의당 의원) 등 의료계의 입장을 대변한 일부 의원의 반대가 지속해서 나오는 배경이다.

박수현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의료 데이터가 민간 보험사에 넘어가면 보험 문턱을 높이는 등의 영리 추구 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절반은 지레 보험금 포기… 소비자 불편은 어디에

올해 6월 기준 가입자 3,930만 명에 달하는 실손보험은 비급여 진료까지 보장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린다. 하지만 급여 진료를 자동 보장하는 건강보험과 달리, 실손보험은 보험금 청구 절차가 까다롭다. 병원에서 보험금 관련 서류를 받아 △스마트폰 앱 △홈페이지 △팩스 △직접 방문 등으로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보험업계는 전자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노령층이나 보험금이 소액일수록 청구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지난 4월 소비자단체 설문조사 결과, 실손보험 가입자 중 거의 절반(47.2%)은 보험금 청구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의료계도 소비자 편익에 협력해야"

정부와 보험업계는 건강보험의 공적 자료를 모두 보유한 심평원을 통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는 입장이다. 다만 의료계 반발을 감안해, 심평원이 의료 정보를 건드릴 수 없도록 제한을 두거나 심평원 대신 보험개발원 등 제3의 기관을 활용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요지부동이다. 정성희 보험연구원 손해보험연구실장은 "현재도 환자가 진료 정보를 보험사에 제출하고 있는데 전산화를 한다고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쌓일지는 의문"이라며 "의료기관은 현재 최소한으로만 작성하는 비급여 통계가 쌓이는 걸 두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선 청구 간소화로 일선 병원이 보험금 관련 행정·민원 업무를 새로 떠안아야 한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보험업계는 청구 간소화로 보험금 청구 서류를 종이로 발급할 때보다 오히려 일이 줄어든다고 반박한다.

의료계의 입장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강성경 소비자와함께 사무총장은 "의료계가 실손보험이 보장하는 비급여 진료를 통해 상당한 이득을 보고 있는 만큼 소비자 편의를 높이는 조치에도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관계자조차 "의료계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란

환자가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 전송을 요청하면 병원은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전산으로 보험사에 보내야 하는 제도다.

박경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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