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안정적 환경에서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국립 기초사회과학 연구원’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등 세계적 학자들을 배출한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처럼 국가가 운영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소가 국내에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연구자 권리 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연구자 권리선언의 의의와 향후과제’ 주제의 토론회를 열어 이러한 제안들을 논의했다. 토론회에는 전국교수노동조합(교수노조),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대학원생노조 등 여러 연구자 단체 구성원들이 참석해 ‘연구자 권리선언’의 실현 방안을 논의했다. 국내 연구자 1,686명이 서명한 연구자 권리선언은 ‘국가가 나서서 연구 공공성을 보호하고 안정적 연구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토론자들은 국가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경제적 잣대로 학문을 재단하는 상황에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연구를 이어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2019년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 지출 비율은 4.64%로 이스라엘에 이어서 세계 2위였지만 연구환경은 열악하고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그러한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일자리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는 지적으로, 대학원생은 ‘머슴’으로 동원된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인문사회과학 학부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자의 길을 걷기를 꺼리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연구 생태계 자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강내희 지식순환 사회적협동조합 대안대학 이사장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노동에 대한 수요는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안정적 연구직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크게 줄어들어 비정규직 교수와 연구원들이 증폭했다”고 지적했다.
강 이사장은 이어서 “국가의 전체 연구개발비 가운데 기업 부문이 정부 부문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이고 기술력 향상이나 노동생산성 증진을 위한 연구 개발에 기업이 큰 힘을 쏟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정부 부문에서 쓰는 연구개발 예산도 기업으로 돌아가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근거로는 지난해 기준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절반 이상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배정됐다는 보고서를 제시했다.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을 국가가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제안이 제시됐다. 박치현 대구대 자유전공학부 조교수는 연구자들의 위기를 학문의 위기로 진단하고 국가가 연구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공공이 예산을 지원해 연구자가 5년 이상 장기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박사제’ 도입 △국립 기초사회과학 연구원 설치 등이 거론됐다.
박 조교수는 이러한 조치가 결국 ‘박사 실업자 구제’이며 ‘자신들이 공부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데 왜 지원해 주느냐’는 비판이 있다고 소개하고 이어서 “기초학문을 지원하는 것이 구제사업인가?”라고 반박했다. 박 교수는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전통문화를 보존하듯이 기초학문에 대한 국가 책임성 원칙을 여전히 확고히 지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토론회에서는 연구자 생태계 안에서 입지를 확고히 굳힌 정년트랙(정년 보장) 교수들부터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박정원 교수노조 위원장은 “근무하던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들을 정규직화하려고 했더니 학과 교수들이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처음부터 정년트랙으로 뽑았으면 더 좋은 교수들을 뽑았다’는 것이었다”면서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러한 싹을 자르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한다”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연구자들은 타인의 노동과 성과물을 가지고 생산하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보다도 더 상호의존적 요소가 강한데 그럼에도 약탈적 성격이 강하다”면서 “대학 교원들의 임금이나 근로조건이 왜 향상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박 위원장은 “학부생들도 석·박사 받으면 어떤 상황이 기다리는지 알고 국가적 인재들이 학문을 기피하고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으로 가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다”면서 “돈키호테처럼 용감하게 불평등과 싸우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학문체계는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