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벨라루스 난민 사태, '서방 vs 러시아' 전면전 치닫나

입력
2021.11.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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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벨라루스에 추가 제재" 경고
러시아, 폭격기 급파해 무력시위
"러시아, 대서양 동맹 시험 의도"

중동발(發) 난민을 국경 밖으로 밀어내려는 벨라루스와 이를 막으려는 폴란드 사이에 빚어진 충돌이 이제는 유럽연합(EU)과 러시아 간 ‘전면전’으로 확전하고 있다. 두 나라의 갈등이 양 진영으로까지 불똥이 튀어 버린 것이다. EU는 이번 사태를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며 벨라루스에 추가 제재를 경고했다. 이에 맞서 러시아는 우방 벨라루스에 전략 폭격기를 급파, 무력 시위에 나섰다. 강추위 속에서 국경 지대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난민들만 인질로 잡힌 셈이 됐다.

1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EU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는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문제와 관련, 벨라루스로 이민자를 이송하는 항공사 등에 대한 제재 조치를 검토하기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이날 폴란드를 방문,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를 만나 “EU 국경이 ‘하이브리드 공격(사이버전·통신망 파괴 등)’을 받고 있다”며 폴란드에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심지어 EU 집행위가 그동안 거부감을 보인 ‘국경 장벽 건설’ 방안마저 언급했다. 15일에는 EU 외무장관들이 모여 벨라루스 추가 제재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EU는 벨라루스가 중동 국가에서 난민들을 데려와 EU로 밀어내고 있다고 의심한다. 지난해 벨라루스 대선 부정 투표, 올해 5월 민항기 강제 착륙 사건 이후 EU가 부과한 경제 제재에 대한 ‘맞불’이라는 주장이다. 8일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에 머물던 난민들이 폴란드 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 사건은 EU에 대한 도전”이라며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주의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한다”고 규탄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발끈했다. 벨라루스의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는 이날 장거리 초음속 폭격기를 벨라루스 영공으로 급파해 동맹 관계를 과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러시아·벨라루스 방공 체계 점검 차원”이라고 설명했으나, EU에 대한 압박 성격이 짙다. 사태 악화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대행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벨라루스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EU 회원국과 벨라루스 간 직접 대화 채널 구축’을 역제안했다. 사실상 중재 거부였다. 크렘린궁 대변인은 “벨라루스 이민 당국은 매우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폴란드가 국경을 폐쇄하면 상황이 더 악화할 것”이라며 EU에 경고장까지 날렸다.

폴란드는 “난민 밀어내기 배후는 러시아”라며 연일 비난을 퍼붓고 있다. EU도 러시아가 사실상 벨라루스의 ‘난민 무기화’를 허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벨라루스를 적극 지원하거나, 최소한 방관하는 수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EU 회원국이 난민 문제에 따른 내정 불안을 겪기를 러시아가 내심 바라고 있다는 의심이다. EU 고위 관리는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미국은 러시아보다 중국을 우선시한다. 직접적이든, 혹은 벨라루스라는 대리인을 통해서든, 러시아는 EU에 긴장을 조성하고 대서양동맹을 시험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유럽에 말했다.

서방과 러시아가 격렬히 싸우는 사이, 난민들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겨울이 시작된 터라 식량과 식수는 물론, 피난처도 필요한 상황이다.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지역에서만 난민 4,000명가량이 노숙 중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EU와 벨라루스 간 갈등이 시작된 후 적어도 8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폴란드 인권단체 활동가 안나 흐미엘레프스카는 “난민들은 겨울철 혹한에 대한 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올까 두렵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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