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 투쟁하다 독재자가 된 니카라과 ‘5선 대통령’ 오르테가

입력
2021.11.08 20:30
야당 탄압·정적 제거… 대선서 4연임도 성공 
국제사회 "엉터리 선거, 권위주의 회귀" 규탄
니카라과 난민 발생 우려… 美에 정치적 부담

미주 국가들 가운데 ‘현역 최장수 국가수반’인 다니엘 오르테가(75) 니카라과 대통령이 4연임에 성공했다. 1980년대 후반 첫 집권기까지 포함하면 통산 5선 대통령이 됐다. 이번 대선은 반대파를 사전에 완전히 뿌리 뽑은 뒤 치러진 탓에, 애초부터 독재 체제 연장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국제사회는 “부정 선거”라면서 강력히 규탄했다. 특히 중남미 이민자들로 골머리를 썩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에는 친(親)이민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정치적 변수로 작용할 공산도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7일(현지시간) 니카라과에선 5년 임기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90명, 중미의회 의원 20명을 함께 뽑는 선거가 실시됐다. 오후 6시 투표가 마감됐지만, 사실 개표는 하나 마나였다. 결과는 뻔했다. 여당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후보로 5선에 도전한 오르테가에 맞설 경쟁자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후보 5명은 인지도가 거의 없다시피 한 데다, 오르테가 정권과 친밀해 ‘무늬만 야당’으로 평가받아 왔다.

오르테가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미국 CNN방송에 따르면 올해 5월 이후 야당 세 곳이 해산되고, 야당 지도부 39명이 체포됐다. 그중 7명은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혔다. 오르테가는 심지어 같은 당 옛 동료들까지 감옥에 집어넣었다. 인권단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니카라과 시민 동맹’은 투표 전날 밤에도 야권 인사 20명이 끌려갔다고 밝혔다. 이런 오르테가가 1979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 영웅이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혁명 이후 실질적 국가수반 역할을 하던 오르테가는 1985~1990년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지냈다. 이후 2007년 재선에 성공한 뒤, 내리 3연임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 대선 승리로 2027년까지 네 번 연속, 통산으로 치면 다섯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2017년 부통령에 당선된 영부인 로사리오 무리요도 다시 부통령에 선출돼 ‘부부 통치’ 또한 5년 연장됐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오르테가 독재 연장으로 니카라과는 억압과 테러의 새 시대를 맞게 됐다”고 짚었다.

더 큰 문제는 내부 저항 세력이 사실상 전멸했다는 점이다. 2018년 반정부 시위 당시 무자비한 진압에 300명이 숨지고, 야권 인사들은 국외로 망명했다. 지난해엔 공공질서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되는 발언을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어졌다. 반대 목소리를 싹부터 도려내겠다는 의도를 노골화했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니카라과 국민들이 그나마 시도해 볼 수 있는 저항은 ‘투표 보이콧’ 외엔 없었다. 현지 매체 라프렌사는 중남미 정치감시단체 우르나스아비에르타스를 인용해 “이날 유권자 81%가 선거에 불참했다”고 밝혔다. 투표율이 20%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라프렌사는 “일부 투표소는 투표 마감 시간을 넘어서까지 문을 열고 있었지만, 유권자들이 찾지 않아 쓸모가 없었다”고 꼬집었다.

국제사회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미주 담당 호세 미겔 비반코 국장은 “오르테가의 탄압은 공포 영화”라며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 형식조차 갖추지 않은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중미 지역이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과 미주기구(OAS)는 “선거의 정당성이 결여됐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고, 코스타리카 정부도 “정치범을 즉시 석방하고 시민권을 회복하라”고 촉구했다.

특히 미국은 제재 카드를 꺼내 들 방침을 시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팬터마임 선거이자 엉터리 선거”라며 “미국은 모든 외교적,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질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중미자유무역협정에서 니카라과를 배제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강공책은 ‘오르테가의 폭정으로 난민이 대거 발생하면 미국에도 상당한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로이터통신은 올해 미국 남서부 국경까지 온 니카라과 난민이 역대 최대 규모인 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최근 중남미 정치 불안으로 난민이 대거 몰리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친이민 정책도 수용 한계와 내부 반발로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NYT는 “바이든 행정부는 중남미 국가의 민주주의 퇴행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그로 인한 국외 탈출 행렬도 막지 못했다”며 “오르테가의 승리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제에 또 다른 타격을 가했다”고 진단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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