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공 유도미사일 ‘천궁’과 3,000톤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을 만든 방산업체들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했다. 방위사업청이 정부가 지정한 협력업체(하도급) 과실로 무기 납품이 늦어질 경우 완성업체(방산업체)에 부과했던 '지체상금'을 대폭 감면하기로 규정을 고치면서다. 이미 군에 납품을 완료해 적용 대상에서 빠질 뻔했던 업체들도 혜택을 볼 수 있게 됐는데, 천궁을 생산한 LIG넥스원과 도산안창호함을 만든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이다.
지체상금은 방산업체가 애초 약속한 날짜에 무기를 납품하지 못할 경우, 정부가 매기는 일종의 벌금이다. 협력업체가 부품을 제때 공급하지 못해 도산안창호함을 해군에 4개월 늦게 인도한 대우조선해양은 950억 원, 협력업체 공장 화재로 천궁을 지연 납품한 LIG넥스원은 120억 원을 물어야 할 처지였다.
방사청은 지난달 26일 열린 정책심의위원회에서 완성업체가 협력업체를 선택할 수 없는 경우, 협력업체의 귀책사유로 납품이 지체되면 문제가 된 협력업체의 계약금에 대해서만 지체상금을 부과하기로 ‘군수품조달 관리규정’을 개정했다. 이전까지는 계약금 전체를 기준으로 벌금을 매겨 천문학적인 지체상금이 발생했다.
도산안창호함의 경우, 납품을 지연시킨 협력업체의 어뢰기만기는 '33억 원짜리 부품'에 불과했지만 잠수함 가격이 1조 원에 달해 지체상금이 950억 원이나 책정됐다. 우리 독자기술로 개발해 지난 9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에 성공, 우리나라를 '세계 7번째 SLBM 보유국'으로 만들어준 도산안창호함이었지만, 완성업체의 속은 탈 수밖에 없었다.
2019년 2월 천궁의 유도탄 구성품(30억 원)을 납품했던 업체에 화재가 발생해 100억 원이 넘는 지체상금을 물게 된 LIG넥스원도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가 협력업체에 3개월간 공장 폐쇄 명령을 내리면서 애꿎은 LIG넥스원만 벌금을 물게 됐다.
더구나 협력업체를 지정한 건 방사청이었다. 국회 국방위원회 관계자는 "방사청이 국산화 부품 비율을 높이기 위해 완성업체 의사와 관계없이 국내 협력업체를 지정해왔다"며 "검증된 해외부품을 쓰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완성업체가 국산화 확대의 부담을 온전히 떠안은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당초 새 규정의 수혜자는 K2전차를 생산한 현대로템이었다. 현대로템 역시 협력업체 과실로 1,000억 원대 지체상금을 낼 처지에 놓였는데, 계약기간이 2023년까지로 구제의 여지가 있었다. 반면 천궁과 도산안창호함은 군에 납품을 완료해 계약이 끝난 상태다.
방사청은 이번에 적용 대상을 '계약이 진행 중인 건'에서 '계약은 만료됐지만 지체상금 이의신청서(면제원)는 제출하지 않은 건'으로 확대했다. 그러면서 방사청에 이의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LIG넥스원과 대우조선해양도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들이 이의신청서를 제출하고 심의위원회가 열리면 새 규정과 정상을 참작해 지체상금이 최종 결정된다. 두 업체의 예상 부담액은 10억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방사청 관계자는 "불합리한 규정이 개선되는 것인 만큼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국회 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업체 봐주기'란 비판을 의식해 개정에 소극적이던 방사청이 마음을 바꾼 건 막대한 소송비용 영향도 있다. 업체가 확정된 지체상금에 불복해 소송이 법정으로 가면 대부분 방사청 패소로 끝나 세금 손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