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수형인, 국가 상대 손배소 사실상 패소

입력
2021.10.0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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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국가배상 책임 인정 불구
원고 대부분 실질적 배상 못받아



제주4·3 당시 불법군사재판으로 피해를 입은 4·3수형인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100억 원대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사실상 패소했다. 법원은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일률적인 손해배상 기준을 적용함에 따라 수형인과 유족 대부분이 실질적인 배상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법원 제2민사부(부잘 류호중)는 7일 오후 제주4·3생존 수형인 이영창씨 등 38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소송에는 2019년 1월 제주지법으로부터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4·3 생존 수형인들과 사망한 4·3수형인들의 유족 등이 원고로 참여했다. 이들이 지난해 9월 국가를 상대로 승소한 53억 원 규모의 형사보상 청구 소송의 경우 억울한 옥살이 자체에 대한 피해를 보상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소송은 공무원들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개별적인 신체적·정신적 손해를 배상받기 위한 성격을 갖는다. 손해배상 청구액은 1명당 적게는 2억 원, 많게는 15억 원까지 총 103억 원 규모다.

재판부는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구금 등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손해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원고 개인별 피해 사실에 대한 주장 대부분은 받아들이지 않고 일률적인 금액을 배상토록 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주장대로 제주4·3 당시 강압적인 수사, 구금, 가혹행위 등으로 후유장애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국가의 불법 행위로 이뤄진 일련의 결과일 뿐이지 별개의 불법 행위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해자 간 구금 기간 차이가 8개월에서 11년까지 적지 않지만, 4·3 수형인별 구금 기간에 따른 형사보상이 지급돼 형평성이 해소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이번 국가배상 청구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기준인 ‘본인 1억 원·배우자 5,000만 원·자녀 1,000만 원'을 일률 적용하고, 원고들이 앞서 수령한 형사보상금을 뺀 차액을 손해배상금으로 산정했다. 이같은 기준을 적용할 경우 이번 소송을 제기한 원고 중 손해배상금을 수령할 수 있는 수형인 등은 14명이다. 배상금액은 1인당 최소 168만 원에서 최고 5,000만 원 등 모두 1억6,000만 원에 그쳤다.

원고들은 이번 판결을 사실상 패소 판결로 받아들이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피해자 측 소송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예상하지 못한 판결이다. 금액을 떠나 피해자들의 개별적인 피해 사실에 근거한 법적 판단이 이뤄지지 않은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의 오랜 고통을 무시한 판결”이라며 “추후 구체적인 판결을 확인한 뒤 불복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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