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사물을 표현하고 인식한다. 물(物)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세상은 언어로 그득하고, 인간은 ‘언어로 직조된 세상’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듯하다. 물고기가 물(Water)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듯 사람도 궁극적 실체 사이에 가로놓인 충만한 언어세계를 인식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언어의 경이는 언어가 자신을 망각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메를로퐁티)”는 말도 나왔으리라.
인간의 뇌 역시 언어로 조직화되고 그 한계도 이어받기 마련이다. 언어가 다르면 사물도 달리 인식된다는 점은 정교하게 설계된 인지 실험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간 교류가 경천지동하게 촉진되었음에도 한국어 쓰는 사람과 영어 쓰는 사람의 사물 인지 방식은 여전히 다르다. 나를 자리매김하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언어를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 부르는 이유다.
언어는 실체와 다르고 그 전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언어는 사물 일면을 제시할 뿐이다. 언어의 존재 의의가 바로 그것이다. 언어능력이 고도화되며 그에 조응한 사피엔스의 뇌는 실체와 분리된 허구를 구성·감각하도록 한다. 세상은 허구, 가상의 실재, 이데올로기 등이 ‘젖과 꿀이 되어 넘치도록 흐르는 땅’이 된다. 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유발 하랄리)”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2,300여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노장자가 경계했던 대목이다.
이러한 논의들을 현학적 나열로 볼 수 있으나, 선각자들의 성과에 의존한 사피엔스의 문화세계에 관한 거친 일별에 가깝다. ‘세계-언어-인간’의 관계에 미묘한 지점이 있고, 여기서 사상, 종교, 철학, 과학의 물줄기들이 뻗어 나오고 있으며, 우리는 그 세상을 살아오고 있다. 이는 법률계에도 문제의 지점이며, 법률종사자에게 주의와 성찰을 요청한다. ‘언어로 언어 밖을 말하여야 하는 자의 모순’에 빠지며 장황한 논의를 늘어놓는 실천적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법은 법률언어의 체계이다. 언어 일반에 비해 법률언어에는 명료한 실천적 요구가 반영된다. 법률언어는 부단하게 사물을 구획하고 정의하고 의미 범위를 한정한다. ‘살인’ 개념은 존속살해, 영아살해, 촉탁살인, 승낙살인, 위계·위력에 의한 살인, 내란 목적 살인, 공모 살인, 살인교사, 자살방조, 생명 있는 도구를 이용한 간접 살인, 정당방위로서의 살인, 1급 살인, 2급 살인, 살인 미수 등 멈추지 않고 분화된다. 살인자라 하여 다 같은 살인자가 아닌 셈이다.
법률종사자는 법률개념과 체계에 익숙하다. ‘공허한’ 개념으로 다채로운 현실들을 재단하게 된다. 법은 사건의 전모를 살필 여유가 없다. 법률적 의미 있는 부분만을 기어코 베어 내기 마련이다. 앞서 ‘언어-실체’의 문제에서 보았듯 법률언어의 존재의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당연시할 경우 법률언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기능을 하고 법률종사자는 ‘법률기계’로 전락한다. “해골이 또 있군. 저건 법률가의 해골일지도 몰라. 지금 그의 궤변, 변론, 소송사건, 토지 보유권 따윈 모두 어디에 있지?”(햄릿 중)라는 비아냥과 구업(口業)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대가 요구하는 바는 정의이지만 정의만 내세우면 그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베니스의 상인)”하여야 한다.
지난 2019년 12월4일 울산지방법원(재판장 박주영)의 동반 자살방조미수 사건 판결은 법률종사자에게 구원의 단서를 제공한다. 법은 한국사회의 자살 현상, ‘순수한’ 자살 자체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동반자살의 경우는 다르다. 이는 서로를 향한 ‘자살방조’ 범죄가 되고 사실 여하에 따라 더 심각한 범죄에 해당될 수도 있다. 법은 개입한다. 형사책임을 묻는 실천적 목적을 위해서만. 그러나 위 판결은 달랐다. 형사책임을 묻는 일을 넘어서서 불행에 이르게 된 피고인들의 생애사를 짚고 자살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뒤르켐의 자살론도 인용하며, 개별 사건을 넘어 사회문제로서의 자살에 관한 사회성원의 책임과 역할을 상기시킨다. 판사는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고 이야기하며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는 문장을 남겼다. 이는 법률언어의 일면성을 넘어서서 실체의 전모를 보기 위한 시도이자 낯설지 않은 연기(緣起)론의 접근방식이다. 언어가 실체에 다다를 수 없듯, 법률언어 역시 사건의 실체에 다다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법률개념의 뒤에 숨지 않는 것, 여기에 법률종사자들의 구원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양동운 법무법인 남산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