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좀처럼 호응하지 않고 있다. “협의는 하겠다”는 립 서비스만 반복할 뿐, 대북제재를 지속하는 등 북한과 대화 재개를 위해 먼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기존 원칙을 굳힌 분위기다.
6일 외교부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참석차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인 정의용 장관은 5일(현지시간)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약식회담(pull aside)을 가졌다. 두 사람은 회담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 남북ㆍ북미 대화 재개 방안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정 장관은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유엔총회에서 제의한 종전선언과 관련, “대북 관여를 위한 의미 있는 신뢰구축 조치”라는 논리로 미국의 지지를 당부했다. 외교부는 “양측이 종전선언 문제를 긴밀히 소통해 나가기로 했다”는 공식 자료를 냈다.
하지만 미국의 속내는 우리 정부 기대와 달라 보인다. 정부 소식통은 “미국도 종전선언이 갖는 의미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시기와 여건을 두고 한미가 이견을 보여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종전선언을 비핵화 협상의 입구로 삼으려는 정부와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가 수반돼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한미 북핵협상 수석대표 협의에서도 종전선언 구상을 설명했지만, 미국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종전선언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건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불신과 대결의 불씨로 되고 있는 요인들을 그대로 두고 종전을 선언한다고 해도 적대적 행위는 계속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조건으로 걸었듯, 미국의 적대 정책이 우선 폐기돼야 종전선언을 다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대북제재 이행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종전선언 실현의 큰 걸림돌로 꼽힌다. 미 국무부는 5일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도 핵ㆍ미사일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보고서를 거론하면서 “모든 유엔 회원국들은 대북결의를 완전히 이행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협상 무대로 복귀시킬 목적으로 추가 유인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한국 측 설득이 여전히 먹혀 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 장관은 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제는 대북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가 됐다”는 입장을 피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