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가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카드를 들고 나왔다. 최근 남북통신선 재개와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하며 남북대화 재개를 시사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를 최고지도자의 '입'으로 재확인한 것이다. 반면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면서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촉구했다. 대남·대미관계에 있어 '강온전략'을 구사한 것은 문재인 정부를 통해 바이든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겠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30일 북한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민족의 기대와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단 10월 초부터 관계 악화로 단절시켰던 북남 통신연락선들을 다시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남북통신선은 지난 7월 27일 복원됐으나 한미연합훈련을 빌미로 북한이 2주 만에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북한은 이후 '도발→대화 제의→도발' 수순을 반복했다.
김 위원장의 연설은 냉·온탕을 오갔던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태도를 공식화한 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개인적 견해'라고 전제한 김 부부장 담화를 김 위원장이 대부분 인정한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공표됐다는 점에서도 북한의 대남기조를 밝힌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남북통신선 재개를 시사한 것은 지난달 28일 북한의 극초음속미사일 발사에 대해 정부가 '도발' 대신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은 데 따른 화답으로 해석된다. 정대진 한평정책연구소 평화센터장은 "김 위원장이 구체적인 시책을 내세웠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도발'로 규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대화의 손짓을 보냈지만 남북 경색 국면의 책임을 떠넘겼다. "북남관계가 회복되고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 나아가는가 아니면 지금과 같은 악화상태가 지속되는가 하는 것은 남조선(남한) 당국의 태도에 달렸다"면서다.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서도 "종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김여정 당 부부장과 리태성 외무성 부장이 담화를 통해 밝혔던 종전선언의 선결 조건인 이중기준과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를 분명히 한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 정세를 "불안하고 엄중한 경색국면"이라고 규정하고 "미국과 남조선의 도를 넘는 무력 증강, 동맹군사활동"을 원인으로 거론했다.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로 조성된 한반도 긴장의 책임을 한미에 전가하고, 북한의 전략무기 개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다.
대미관계에는 선을 그으며 한미를 의도적으로 분리했다. 김 위원장은 "새 미 행정부의 출현 이후 지난 8개월간의 행적이 명백히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적대시 정책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며 "오히려 그 표현 형태와 수법은 더욱 교활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올 1월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북한 외교 관리들이 미국을 비판한 적이 있지만, 김 위원장이 직접 바이든 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조건 없는 대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제재 완화 등에 응하지 않는 미국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또 "남조선 당국이 계속 미국을 추종해 국제 공조만을 떠들고 있다"고 했다. 한국이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미국과 '잘 조율된 실용적 대북정책'을 펴기로 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이 독자적 움직임에 나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이끌어 달라는 주문이다.
'대화 없이 제재 해제도 없다'는 미국의 확고한 입장을 감안할 때, 한국을 징검다리 삼아 북미대화 여건을 보다 유리하게 조성하려는 셈법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과 직접 통하겠다는 과거와 달리 한국을 완충 장치로 설정해 미국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면서 협상의 문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정부는 통신선 복원을 계기로 남북 장관급회담,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통신연락선 복원과 안정적 운영이 기대된다"며 "북한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해 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