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간판 반도체 회사인 인텔이 10년 동안 최대 800억 유로(약 110조3,000억 원)를 투자해 유럽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연초 파운드리(위탁생산) 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업계 선두인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를 겨냥해 투자계획을 쏟아내고 있는데, 한편에선 이런 인텔의 행보가 우려스럽다는 의견도 나온다.
8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7일 독일 뮌헨의 자동차 전시회 'IAA 2021'에서 이 같은 투자계획을 공개했다. 유럽에 향후 10년 동안 최대 800억 유로를 투자하는 프로젝트다. 다만 겔싱어는 올해 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지역을 공개하겠다고만 하고, 어떤 칩을 생산할지 등 다른 핵심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지난 3월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대규모 투자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에 200억 달러(약 22조6,100억 원)를 투자해 2개의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지 반년도 안 돼 거의 1,000억 달러(약 800억 유로) 규모의 유럽 프로젝트를 예고한 것이다. 올 들어 인텔이 밝힌 투자 프로젝트 규모만 어림잡아 1,200억 달러(약 139조 원)에 육박한다.
인텔은 지난 4월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을 언급하며 올해 내 자동차 회사를 위한 칩생산에 나서겠다고 한 바 있다. 이에 인텔이 유럽을 첨단 자동차 칩 생산 전진기지로 활용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갤싱어는 이날 "자동차는 타이어가 달린 컴퓨터가 되고 있다"며 "지금은 자동차 제조비용 중 칩이 차지하는 비중이 4%지만 2030년엔 20%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율주행 시대 개막으로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인텔 역시 이 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BMW 등 100여 개 자동차 제조사가 인텔과 협력하기로 했다.
인텔이 미국과 유럽에 집중하는 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는 반도체 생산 거점인 아시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대대적인 산업 육성책을 추진 중이다.
인텔은 자신이 적임자라며 미국과 유럽 정부에 적극 로비를 벌이고 있다. 막대한 투자가 뒤따라야 하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정부가 보조금만 지원해주면 얼마든지TSMC·삼성전자와 경쟁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인텔은 투자계획뿐 아니라 2025년까지 1.8나노 칩을 생산하겠다는 기술 로드맵까지 공개한 상황이다.
다만 이런 인텔의 행보에 회의론도 적지 않다. 유럽은 첨단 칩 공장을 짓는데 비용이 많이 들고 절차도 복잡해 돈만 낭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첨단 칩 제작에 사용되는 EUV는 네덜란드의 ASML이 유일하게 생산하는데, 이미 주문이 꽉 차 인텔이 구하기 어려울 거란 분석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문가를 인용해 "인텔이 TSMC와 삼성전자를 따라잡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일단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만약 실패하면 상당히 불행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