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는 글자 없이 움직이지 않아요. 인간이 쓰고, 만드는 것인 만큼 그 안에는 각자의 스토리가 담겨 있죠. 스토리와 스토리가 모이면 세상이 되고, 우주가 돼요." 지난달 출간된 '글자 속의 우주'를 쓴 서체 디자이너 한동훈(30)씨의 설명이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의 박윤정&타이포랩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글자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것의 외피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책이나 신문의 글자뿐 아니라 거리의 간판, 공사 표지판, 기업의 로고(CI), 스포츠팀 유니폼, TV 프로그램의 자막, 급기야 선거 포스터 서체까지 그는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는다. 글자 모양과 그 속에서 우리 시대의 행간을 읽고자 한다. 글자를 업으로 하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주변 글자에 일일이 집중하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겠죠. 그래서 보통은 적당히 머릿속에서 생략하고, 눈에 띄거나 예쁜 글자만 주목하면서 생활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체 디자이너에겐 일상이 거대한 라이브 뮤지엄과 같아요."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게 그의 관심사다. 그는 "원래 알던 뻔한 명조와 고딕이라도 문득 보면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며 "글자를 보면 그 글자가 가진 넓고 좁음, 얇고 두꺼움, 획 모양 등 특성을 찾고, 주목할 점은 무엇이고, 고칠 게 있는지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 순간을 포착해 카메라에 담고, 종종 글로 옮겼다. '글자 속의 우주'는 그 결과물이다.
그중 역대 대선 포스터를 살펴보다 발견했다는 반복된 루틴이 흥미롭다. 1987년 당선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포스터에 '노태우'라는 글자를 레터링(필요한 몇 글자를 디자인한 것)했고,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폰트(동일한 모양을 가진 글자 세트)를 썼다. 이후 당선자들은 레터링(김대중)·폰트(노무현)·레터링(이명박)·폰트(박근혜)·레터링(문재인)으로, 번갈아 썼다는 것.
그는 "대선 후보면 하나의 거대한 개인 브랜드인데 후보자 이름을 선거 전용으로 레터링한다는 개념이 의외로 보이지 않더라"며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선거 포스터에 들어가는 이름을 별도 디자이너의 디렉팅하에 만들어 화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 루틴대로라면 내년 대선에선 후보명을 폰트로 쓴 후보가 당선되는 것일까. "다음 대선에선 글자까지 세심히 챙기는 경향이 심화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그런 비주얼적인 면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쓴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릴 적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글자에 매료된 건 한글디자인 수업을 들으면서다. "흑과 백이 불러일으키는 무한한 조화"에 한없이 무력해졌다. 특히 한글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단순함 속에는 근거 없는 부분이 없거든요. 몸의 각 부분과 하늘, 사람, 땅에서 따온 디자인, 이를 분해·조합해서 온전한 한 글자를 만든다는 발상은 (금속활자 조각을 움직여 판을 짜고 재배치한다는) '타이포그래피'의 고전적 정의와도 일치합니다. 문자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단순성에 사로잡혔죠."
그의 목표는 서체 디자이너로서 개성 있고 아름다운 폰트를 꾸준히 출시하는 것이다. 한글뿐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문자 디자인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라는 자세로, 글자라는 큰 틀 안에서 즐겁게, 꾸준히 활동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