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깃발 사세요. 크기도 다양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노점상을 하는 주민 샤드 모하마드는 요즘 들어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을 상징하는 흰색 깃발을 팔고 있다. 그는 “과거 세차용 걸레를 팔던 땐 하루 4달러도 못 벌었는데 지금은 15달러를 번다”고 말했다. 노점 주변으로는 탈레반기를 꽂은 자동차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30일(현지시간) 미군의 아프간 철수 작전이 종료되기 직전, AP통신이 전한 이 풍경은 카불이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발길이 끊겼던 시장은 문을 열었고, 거리는 평소처럼 교통 체증으로 혼잡하다. 이전 정부에서 일했던 경찰관들도 다시 나와 교차로에서 교통 통제를 하고 있다. 영업을 재개한 은행 앞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늘어서 있다. 공원에서는 소년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통신은 “피란민 수천 명이 공항으로 몰렸던 아비규환의 상황과는 극명한 대조”라고 평했다.
카불 주민들은 이제 탈레반 통치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표정엔 체념과 공포가 가득했지만, 일말의 기대감도 교차했다. 자택 은신 중이던 한 여성 예술인은 잠시 외출했다가 탈레반 대원들과 인사를 나눈 일화를 미 일간 뉴욕타임스에 전하며 “눈이 마주친 순간 난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중했다. 어쩌면 내 생각과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고 했다. 오토바이 판매점 주인도 “몇 주 전만 해도 오토바이 강도 때문에 카불에선 오토바이 통행이 금지됐다”며 “(이제) 치안은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공공서비스는 어떨지 지켜봐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탈레반이 20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의 표출이다.
물론 탈레반의 공포 정치 부활 조짐도 여전하다. 여성을 향한 폭력, 언론 탄압 등은 현실이다. 전직 아프간군 장교는 “협박 전화를 받고 은신처를 수차례 바꿨다. 도시가 감옥이 됐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아프간 민중에게 가장 두려운 건 ‘생계 위협’이다. “탈레반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밀가루와 연료 등 생필품 가격은 급등했고, 문 닫는 회사의 속출로 임금을 못 받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수입 의존도가 큰 나라인데, 국경 봉쇄로 물자난은 더 악화됐다. 국외 자산 90억 달러(약 10조 원)는 동결됐고, 국내총생산(GDP)의 40%인 해외 원조도 끊겼다. 국제신용평가그룹 피치의 아시아 담당 안위타 바수는 “아프간 GDP는 2년 안에 10~20% 감소할 것”이라며 “통화 가치가 계속 약세를 보이면 초인플레이션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인도주의 위기도 심각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 54%였던 빈곤층은 현재 72% 수준까지 급증했다. 인구 3분의 1가량인 1,400만 명이 기아 상태이고, 5세 미만 아동 절반은 영양실조를 겪는다. 9월 말이면 구호단체의 식량 비축분도 바닥난다. 더구나 기후변화에 따른 극심한 가뭄 탓에 올해 곡물 생산량은 40%나 줄어들었다. 누르 아마드 아훈드자다 카불대 교수는 “10년간 국가 예산 50% 이상이 전쟁에 투입됐다. 전쟁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했다. 현재 아프간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진단했다.
관건은 결국 탈레반이 아프간 민초의 삶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느냐, 곧 탈레반의 국가 운영 능력이다. 그러나 민심은 불신으로 가득하다. 아프간을 떠나려는 행렬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식당 직원 무스타파는 “가족을 부양하려면 이 나라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고 AP통신에 말했다. 모하마드 야신도 “해외 재정착을 도와줄 지인을 찾아 이메일을 뒤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제는 공항 대신 접경 지역에 주민들이 몰리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하지만 곳곳에서 탈레반이 검문을 하고 있어 국외 탈출은 난망한 상황이다. 베카 헬러 국제난민지원프로젝트 대표는 “아프간 국경 지역은 엄청나게 혼잡하고 폭력이 난무한다”며 “이웃 국가들이 국경을 열어 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엔난민기구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의 아프간 난민은 260만 명으로, 그중 220만 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