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돌아간 남북관계에 청사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광복절 경축사에 담긴 대북 메시지는 “인위적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루겠다” 등 남북관계 진전 구상을 제시했던 과거와 달리 ‘안전지향적’ 내용들로 채워졌다. 북한을 “동아시아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던 ‘방역 협력’을 다시 강조한 정도다. 북한이 남북 통신연결선 복원 2주 만에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 실시를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등 남북관계가 냉ㆍ온탕을 오가자 당분간 상황 관리에 중점을 두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15일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동북아 번영에 기여하는 ‘한반도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서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독일을 예시로 들었다. 이어 “동북아 방역ㆍ보건 협력체는 지금 정보공유와 의료방역 물품 공동비축 등 협력 사업을 논의하고 있다”며 북한의 참여를 촉구했다. 감염병 대응이란 공통 관심사를 고리 삼아 북한을 지역협력체에 편입시키겠다는 구상을 한반도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를 양자 틀을 넘어선 다자체제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보다 후퇴한 면이 있다. 지난해 6월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남북이 냉각기에 접어들자 문 대통령은 코로나19와 북한 지역 집중호우를 언급하며 “남북협력이야말로 최고의 안보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이산가족 상봉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체적 제안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경축사 단골 주제인 종전선언은 물론 철도연결, 이산상봉 등 새로운 대북 방법론은 나오지 않았다.
분량도 확 줄었다. 경축사에서 한반도 정세에 할애된 부분은 전체 6,020자 중 661자에 불과했다. 지난해는 900여 자였다. 지난달 27일 통신선 재가동으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지만, 한미훈련을 놓고 도발을 염두에 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담화가 잇따라 나오면서 진퇴양난에 처한 정부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때문에 당장은 담대한 제안 대신 절제된 메시지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방역ㆍ보건 협력체 참여 제의 역시 정부로서는 안전한 선택이다. 제재와 백신 부족 등 경제난에 시달리는 북한이 관심을 보일만한 최적의 의제이기 때문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남북관계가 불확실해 북한의 반응을 가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흠 잡히지 않는 원론적 메시지를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재인 정부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