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정부가 총기 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 미국 총기 회사들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섰다. 미국의 느슨한 총기 관련 법률과 총기 업체들의 무분별한 사업 관행 탓에 미국산 무기가 멕시코 범죄 집단에 흘러 들어가 숱한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향후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미국 내 총기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여론도 이참에 좀 더 힘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4일(현지시간) 미 일간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멕시코 정부는 이날 “미국 총기 업체들의 사업상 과실이 멕시코 총기 밀매의 원인으로 작용해 수십 년간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다”며 미 총기 회사 10곳을 상대로 매사추세츠주(州) 연방법원에 민사 소송을 냈다. 특정 국가의 중앙 정부가 미국 총기 회사를 제소한 건 처음이다.
이번 소송의 피고가 된 기업은 스미스앤드웨슨과 베레타, 콜트, 글록 등 주요 총기 제조업체들과 총기 도매상인 인터스테이트암즈 등이다. 손해배상 청구 금액은 소장에 명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밀수된 총기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의 1.7~2%라는 점을 감안할 때, 최대 100억 달러(약 11조4,000억 원)에 달할 수도 있다는 게 멕시코 외무부의 설명이다.
그동안 멕시코 정부는 자국 내 강력 범죄를 미국산 무기가 부추긴다고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총기 판매와 사적 사용은 법으로 엄격히 규제되지만, 암시장에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과의 인접 국경을 통해 밀반입되는 총기가 워낙 많기 때문인데, 2014~2018년 불법 유통된 총기 70%가 미국산이었다. 이들 총기는 대부분 마약카르텔 등 범죄집단 손에 들어간다. 2018년에만 총기폭력에 3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올해도 벌써 1만6,000명이 살해됐다.
멕시코 정부는 미 총기 업체들이 자사 무기의 멕시코 밀반출을 알면서도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멕시코 범죄집단의 관심을 끌어 무기 판매를 의도적으로 촉진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 콜트사(社)가 제조한 38구경 권총엔 멕시코 혁명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얼굴과 그의 명언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멕시코 시장을 콕 집어 겨냥한 마케팅이라고 볼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이 총은 2017년 멕시코 언론인 미로슬라바 브리치 벨두세아를 살해하는 데 사용됐다.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멕시코 외무장관은 “이 소송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 총기 업체가 무기 판매와 마케팅에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라며 “소송에서 이기면 불법 무기 밀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 총기업계 이익단체인 전미사격스포츠재단(NSSF)은 “멕시코에 만연한 범죄와 부패의 책임은 멕시코 정부에 있다”고 즉각 반박했다.
일부 법률 전문가들도 승소 가능성엔 회의적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미 연방법에 따라 총기 회사들은 총기 폭력 희생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소송이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총기 규제 강화 노력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할 수는 있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칼 토비아스 리치먼드대 법학 교수는 “소송은 미 연방정부와 바이든 대통령의 관심을 끌어내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