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는 모든 이를 위해" 메달 박탈 위기에도 'X' 세리머니한 선수

입력
2021.08.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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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환던지기 은메달리스트 
IOC '정치 표현 금지' 규정에도
시상식서 두 팔 올려 'X' 세리머니
동성애자·흑인 등 소수자 위해 목소리

여자 포환던지기 은메달리스트 레이븐 손더스(25·미국)가 도쿄올림픽 시상식에서 억압에 저항하는 의미의 'X'자 세리머니를 펼쳐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출전 선수들에게 정치적 함의가 담긴 세리머니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손더스는 1일 일본 도쿄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자 포환던지기 결선에서 19m79를 던져 20m58을 기록한 중국의 궁리자오(32)에 이은 2위에 올랐다. 3위는 19m62를 던져 4회 연속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밸러리 애덤스(37·뉴질랜드)였다.

문제의 장면은 시상식에서 나왔다. 다른 메달리스트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던 도중 손더스가 머리 위로 두 팔을 들어올리며 'X' 모양을 만든 것이다. 손더스는 웃음기 없는 비장한 표정을 지어, 활짝 웃으며 메달과 꽃다발을 양손으로 들어올린 다른 선수의 모습과 비교됐다.

손더스는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억압받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한 행동이었다"며 'X'자 세리머니를 한 이유를 밝혔다. 손더스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억압과 싸우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플랫폼조차 없다"며 "나는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손더스는 늘 자기 자신을 '헐크'라고 불러왔다.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대회에서 3회나 챔피언에 올랐던 손더스는 동성애자이자 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데 앞장서 왔다. 올림픽 참가를 앞두고 머리를 녹색과 보라색으로 염색한 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인 '헐크'와 '조커'를 본뜬 것이다.

다만 IOC는 선수들의 시상식 도중 정치적 의사 표현을 금지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IOC 헌장 50조는 올림픽 경기장과 시설 등에서 어떠한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동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메달 박탈의 징계까지 받을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남자 축구 대표팀의 박종우(32)가 3·4위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독도 세리머니'를 했다가 메달 박탈 위기에 처했었다. 박종우는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종료 6개월 뒤인 2013년 2월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선수들의 의사 표현을 과도하게 규제한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IOC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기자회견에서의 자유로운 발언을 허용하는 등 의사 표현 기회를 확대했다. 다만 경기 및 시상식에서의 표현은 여전히 금지됐다. 손더스는 이런 논란에 대해 "우리 세대는 (메달 박탈을) 걱정하지 않는다"며 "흑인과 성소수자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손더스의 시상식 몇 분 뒤에는 미국 펜싱의 레이스 임보든(28)이 남자 플뢰레 단체전 동메달 시상식 때 오른손 손등에 'X'를 그리고 여기에 동그라미를 친 것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임보든은 지난 2019년 팬아메리카대회(범미주대륙대회) 시상식에서도 국가가 연주될 때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벌인 바 있다. 당시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하자 이에 항의하는 취지의 세리머니였다.

IOC 측은 손더스와 임보든의 세리머니에 대해 "조사 중"이라는 입장이다. 마크 애덤스 IOC 대변인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면밀히 알아본 뒤 필요하다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