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마산항 중앙부두. 파란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청색 비닐에 싸인 동상 하나가 찌는 듯한 더위 속에 꿋꿋하게 서 있었다. 포장 비닐 위로 황색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어 언뜻 미라처럼 보이는 상. 주변의 한 상인은 “61년 전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이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라며 “다 만들어 놓고도 한 달 가까이 저 상태로 있다”고 말했다.
'3·15의거 참여자의 명예 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김주열(1944~1960) 열사 동상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제막식은 지난달 30일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추모판에 새겨진 '4·11 민주항쟁'이라는 단어를 놓고, 관련 단체가 충돌하면서 제막식이 무기한 연기됐다.
김장희 (사)3·15의거기념사업회장은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13일까지 마산지역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해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3·15의거라고 법률은 정의한다"며 “4월 11일은 김 열사 시신 인양일로 공인된 날도 아닌데 이를 4·11민주항쟁이라 한다면 3·15의거를 반 토막 내려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21년째 4월 11일 시신 인양지에서 공식 추모제를 열어 왔으며, 동상이 세워진 곳이 김 열사 시신 인양지여서 부조물에 '4·11 민주항쟁' 으로 새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4월 11일 김 열사 시신이 발견돼 전국의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폭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현재로선 김 열사 동상이 언제 빛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창원시 관계자는 "두 단체 간 합의가 도출돼야 제막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란은 창원시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4·11민주항쟁’ 명칭 논란은 지난해부터 시작됐으나 창원시는 사전 의견 수렴 없이 지난 2월 1억5,200만 원을 들여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와 동상 건립에 착수했다.
5m 높이 동상은 청동(브론즈) 재질로 교복을 입고 가슴에 손을 얹은 김 열사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현했다. 부조물에는 김주열 열사 생애, 3·15의거, 3·15부정선거, 4·11민주항쟁, 4·19혁명, 건립취지문 등이 새겨져 있다. 건립취지문에는 "영원한 민주의 횃불이요 동서화합의 상징인 김주열 열사 동상을 건립해 불의에 항거한 3·15, 4·11, 4·19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며 '4·11민주항쟁'을 3·15의거와 별도로 명명해 새겼다.
전북 남원 출신인 김 열사는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1학년 때이던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됐다가 실종 27일 만인 4월 11일 중앙부두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진 채로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