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역내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55% 감축하는 '55에 맞추기(Fit for 55)' 안을 포함한 '2050 탄소 중립' 정책 패키지를 발표하면서 세계 최초의 '탄소국경세' 제도가 그 베일을 벗었습니다.
동시에 미국에서도 집권 민주당이 3조5,00억 달러(약 3,992조 원) 규모의 인프라를 마련하는 친환경 예산안에 유럽의 탄소국경세에 상응하는 새 조세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요. 탄소 배출량이 많은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안을 포함시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도 내년 3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경기지사가 탄소국경세 도입을 맞아 저탄소 체제로 빠르게 전환하지 않으면 추가 관세를 물고 우리 기업들과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요.
탄소국경세는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국제사회의 근본 해법으로 꾸준히 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비용 부담이 커지는 산업계의 반발을 감안하다 보니 쉽게 적용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유럽에서 탄소국경세 도입 시기까지 못 박으며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정부는 물론 특히 산업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것인데요.
특히 현재까지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인 이 지사가 탄소국경세 도입 등 글로벌 산업 전반의 변화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탄소세 도입을 꺼내면서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탄소국경세는 EU 집행위원회가 최근 제안한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BAM)'의 줄임말입니다.
유럽에서 생산되는 제품보다 탄소 배출이 많고 규제가 느슨한 국가나 생산 시설에서 만들어져 유럽으로 들어오는 수입 상품 및 서비스를 대상으로 그에 상응하는 관세를 부과한다는 제도인데요. 탄소를 담고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EU 역내로 들어올 때 세금을 내게 하겠다는 개념이죠.
그럼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탄소국경세는 탄소배출권거래제와 관계가 깊습니다. EU는 2005년 세계에서 처음 탄소배출을 제한하는 배출권거래제를 도입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EU 집행위는 유럽 내에서 발전 분야와 항공업계 등에 적용되고 있는 탄소배출권거래제도(ETS)를 강화하는 동시에 그동안 면제 대상이었던 철강 업계 등에도 탄소 배출권을 구입하도록 강제하겠다는 방침입니다. 3년 동안 전환 기간을 둔 뒤 2026년부터 본격 시행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되면 이들 기업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새 기술 연구개발(R&D)에 투자를 해야 할 이유가 생기게 되겠죠.
예를 들어, 가솔린(휘발유)이나 디젤(경유)을 연료로 쓰는 내연 기관 자동차 대신 전기차나 수소차를 개발하는 데 비용이 드는 식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데, 이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 탄소국경세입니다.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강한 유럽에서 생산한 제품과 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한 수입품의 탄소 배출량 차이를 돈으로 보전하는 제도예요.
EU의 수입업자는 해마다 5월 31일까지 전년도 수입품에 포함된 탄소 배출량을 신고하고 CBAM 인증서를 사야 합니다. 배출량 검증이 어려울 경우 EU가 제시하는 기준값을 적용한다고 해요. 인증서 1개는 탄소 1톤에 해당하며 품목별 탄소량은 제품을 생산하면서 생기는 직접 배출량으로 계산합니다.
탄소국경세는 사실상 추가 관세 기능을 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 온실가스 감축 효과와 더불어 유럽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 저하를 막는 방패 역할도 하게 되는데요. 유럽 내 기업들에는 더 열심히 탄소 배출량을 줄이도록 채찍질을 하는 대신 탄소 국경세를 통해 위기에 빠질 가능성을 줄여주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기 등 탄소 배출이 많은 수입품을 1차 표적으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유럽 내 철강·시멘트 업체가 이 비용 때문에 탄소 배출을 규제하지 않거나 느슨하게 규제하는 다른 국가의 같은 업계 회사들과 경쟁에서 밀리지 않도록 해외 업체에도 그에 상응하는 관세를 더 내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EU는 ETS와 CBAM을 통해 얻는 추가 수입을 화석 연료 대신 신재생 에너지로 바꾸려는 에너지 전환 기업에 재투자하고 이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재교육과 직업 훈련 받을 기회를 주고, 주거 등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미국 역시 비슷한 시점에 민주당이 3조5,000억 달러 수준의 친환경 예산안을 마련하면서 탄소 배출량이 많은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안을 포함하기로 했죠. 탄소세 도입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죠.
다만 미국의 경우 북동부 10개 주와 캘리포니아주 정도가 ETS를 도입해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연방 전체에 걸친 ETS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둘러 탄소국경세 도입을 공개한 이유가 EU의 선제적 제안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어요.
EU가 야심차게 먼저 탄소국경세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역내외의 저항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죠. 당장 EU에 있는 철강과 시멘트 업계는 비용 문제를 이유로 배출권을 사지 않아도 되는 유예 기간을 최대한 늘리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 별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기계와 자동차 산업이 강한 독일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해요. 최근 슬로베니아에 모인 유럽 환경 장관들도 탄소 국경세 도입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보였다고 합니다.
특히 여러 나라 장관들이 탄소 국경세 도입으로 연료 및 난방 비용이 오르게 되고 자칫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가 재현될 수 있다고 걱정했는데요.
프랑스에서는 2018년 11월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유류제 인상 조치에 항의하면서 노란 조끼 시위가 대대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시위대 이름은 유류세 인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운전자를 상징하는 노란 형광 조끼에서 따왔어요.
이에 EU 집행위가 700억 유로(약 95조 원) 규모의 연대 기금 설립을 제안했지만, 아직 많은 관련 나라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상태입니다.
미하우 쿠르티카 폴란드 환경장관은 "우리는 새로운 분열과 불평등을 도입해서는 안 되며 빈곤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 등 탄소국경세의 가장 큰 표적이 되는 국가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이들은 이를 일종의 무역 장벽으로 취급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쟁점화하려 하는데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4월 "기후변화와 전쟁이 무역 장벽의 구실이 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댄 테한 호주 통상장관도 EU의 탄소국경세가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요. 캐나다,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도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탄소국경세 도입을 2030년부터 탄소 감축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중국을 더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무장관 출신 존 케리 미국 기후특사는 지난달 20일(현지기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탄소국경세 도입과 관련해 "우리(미국)는 프랑스, 네덜란드, EU와 매우 긴밀하게 협의했다"며 "중국 및 다른 국가와도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서구와 중국의 대결이라는 현실 정치 구도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EU 수출이 많은 철강 산업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요.
그린피스가 EY한영회계법인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철강업계는 수출액 가운데 2023년 5%, 2030년 12%가량을 탄소국경세로 내야 할 수도 있다고 해요. 주요 철강업체의 영업이익률이 10%가 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칫 손해를 보고 물건을 팔아야 할 상황이 닥칠 수도 있는 것이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최근 발간한 정책브리핑에서 "EU의 탄소 국경 조정제도에 대응해 우리 환경 제도 등을 강조해 면제를 받기 위한 노력을 함과 동시에, 우리도 유사한 탄소 국경 조정 조치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