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의 야구민국] "하늘이 대구상원고를 버리지 않았구나!"

입력
2021.07.14 14:07
올해 대구 체약체로 평가되던 상원고 청룡기 2연승
전주고와 10회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역전승 
1학년 이호준 선수의 빼어난 활약으로 감격 승리



올해 대구에서 약체로 평가되던 상원고(구 대구상고) 야구부가 제76회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 대회에서 2연승을 기록 중이다. 한 마디로 의외다. 상원고의 전통과 명성을 생각하면 의외란 말이 뜻밖의 표현으로 다가오겠지만 아마 야구계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한다.

올해 상원고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다. 적나라하게 밝히자면 상원고의 올해 전력은 "역대급으로 약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최근 신입생 스카우트 전에서 대구고, 경북고에 밀렸고 작년 또한 그게 다르지 않았다. 김승관 감독이 수장 자리에 올라 실질적으로 팀을 진두지휘하는 것도 올해가 첫해이다. 작년에 스카우트한 신입생 또한 김승관 감독이 직접 선발한 선수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상원고는 올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올해 3학년의 기량만 볼 때는 경북고가 비교적 우세하고, 2학년의 전력은 절대적으로 대구고가 강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평가였다. 상원고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상원고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약하다" 중론

상원고는 올해 개교 98주년, 내 후년 개교 100주년에 맞춰 전국제패를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전국 제패가 준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상원고의 주말리그 성적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혹은 경기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전반기 주말리그 성적은 4승2패, 후반기 주말리그 2승5패였다. 과거와 비교하면 약해도 너무 약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주말리그 경기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른 사정이 보인다. 우선 전반기 주말리그는 승패가 중요하다. 전반기 순위로 전국대회 출전권이 좌우되는 까닭이다. 1위팀에게만 메이저대회의 모든 출전권이 부여된다. 이는 곧 선수들이 경기를 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 된다. 동시에 프로 진출이 아닌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에게는 경기 출전이 필수조건이다. 투수의 경우 기본 이닝 이상 마운드에 올라야 하고, 타자는 기본 타석수를 확보해야 입학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상원고는 전반기 주말리그에서 대구고와의 경기를 제외하면 우승팀 경북고와의 경기에서도 5대3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그리고 나머지 팀들에게는 모두 승리했다. 올해의 경북고 상원고 전력차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라이벌전인 상경전이라고 해도 박빙의 승부는 의외의 결과였다.

그러나 후반기 주말리그는 성적이 전반기와 사뭇 달랐다. 승리는 2번, 패를 5번이나 당했다. 2승도 올해 신생팀 밀성고와 클럽팀으로 있는 합천 야로 베이스볼팀에서 이긴 것이 전부였다. 결과만 놓고 보면 동문회에서 들고 일어날 수준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다. 경기 운영에는 3학년들 선수들의 진학을 위한 감독의 배려가 녹아들기 마련이다. 실력만으로 라인업을 짜기 힘들다. 성적을 못 내면 비난이 쏟아지고 이를 혼자서 감수하고, 때론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3학년 선수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는 상원고 야구부만의 일은 아니다. 타 팀 야구부 감독 역시 어느 정도 배려를 한다.

하지만 상원고처럼 야구 명문팀의 감독의 자리에서는 ‘배려’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3학년의 기량이 비교적 약하다는 것이 아마 야구인들의 야구관계자들의 일관된 평가이지만 도저히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학부모들이다. 아마 야구계의 우스갯소리 중에 "중학교 자녀를 둔 학부모 눈에 자기 자식은 모두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적어도 프로는 진출할 것으로 확신한다. 부모의 눈에는 자기 자식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있다. 팀을 위한 감독의 선택에 늘 이의를 제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승관 감독 "실력 위주 라인업" 이두희 교장 "전폭지지"

야구계의 기대와 학부모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김승관 감독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변화한 모습을 보였다. 올해 첫 출전한 전국대회인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대회에서였다. 대회 전 선수단과 학부형 소집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주말리그와 달리 전국대회는 학년 상관없이 실력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해서 경기를 치루겠다. 더 이상 학교의 명성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두희 교장과의 면담에서도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

사실은 주사위를 던진 것이었다. 실력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한다고 해서 경기에 승리가 100%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성적이 부진하다면 출전하지 못한 3학년 학부형들 사이에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었다. 김 감독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지만, 한번 시도해보지도 물러서긴 싫었다. 소신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이두희 교장이 전적으로 김 감독을 지지해주었다. 그는 "라인업 구성은 전적으로 감독 고유 권한이다. 어떠한 외압도 내가 막아주겠다. 상원고의 명성을 위해 소신껏 해라"는 격려의 말을 전했다.

지금껏 학년에 밀려 라인업에 자주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선수들이 다수 경기에 참여했다. 기회가 주어지자 펄펄 나는 모습을 보이는 제자들이 나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1학년 유격수 이호준 선수였다. 174㎝의 72㎏, 체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날렵하고 민첩한 움직임을 자랑한다. 공을 잡은 후 송구까지 물 흐르듯 플레이가 자연스럽다. 여기에 강한 어깨, 빠른 발, 야구 센스, 순간 상황 판단까지 유격수로서 빠지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이 선수의 진짜 능력은 타석이 들어섰을 때 드러난다. 손목이 강하다. 야구 관계자들은 전성기 때의 한대화 선수를 떠올리게 한다고 평가한다. 강하고 빠른 허리 회전, 거기에다 찬스를 놓치지 않는 결정력까지 갖추었다. 게다가 1학년에 불과하다.

사실 이번 대회 이전부터 이 선수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었다. 7월3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울산공고와 상원고의 후반기 주말리그 경기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6대5, 1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9회초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다. 9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1학년 이호준이 타석에 들어왔다. '어라, 1학년? 감독이 경기 포기했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섬 주섬 짐을 챙기는데 우측 펜스 상단 그물망을 넘겨버리는 동점 홈런이 터졌다. 이날의 활약으로 이호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야구 관계자가 적지 않다.

이 홈런 덕분에 청룡기에서 주전으로 활약을 시작하자 '명불허전'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었다. 그만큼 그 홈런이 강렬했던 까닭이었다. 실력 위주의 라인업 덕분에 청룡기 대회 1회전에서 상원고는 우신고를 비교적 쉽게 이기고 2회전에 들어갔다.



상원고를 살린 이호준 "하늘이 상원고를 버리지 않았다!"

2회전 상대는 전북의 명문 전주고였다. 개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주고 전북에서는 최고 명문 학교인 데다 올해 명문고야구열전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전주고에 우위가 점쳐졌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야구인들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맞네. 대구상고가 이름값을 하는 구나"하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9회까지 4대4.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10회초 전주고가 2득점을 올렸다. 전주고가 6대4 리드를 잡았다. 연장 10회말, 상원고 마지막 공격이었다. 2아웃 만루 상황이 벌어졌다. 팀이 승패의 기로에 섰다. 타석에 1학년 이호준이 들어섰다. 1스트라이크 1볼. 다음 공은 몸쪽으로 날아오는 직구였다. 이 선수는 그대로 받아쳤다. 투수와 2루 사이로 빠지는 중전안타. 2루 주자와 3루 주자 홈인, 6대5가 됐다. 2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든다. 그 사이 공은 중견수의 손을 떠나 포수에게 날아들었다. 주자가 홈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공보다 주자가 더 빨랐다. 6대6. 그 사이 1루베이스를 밟던 이호준이 모든 시선이 홈에 쏠려있는 틈을 파고들었다. 2루로 냅다 달렸다. 깜짝 놀란 전주고 포수가 이 선수를 잡으려고 2루로 송구했다. 이때 3루에 있던 또 한 명의 주자가 홈으로 질주했다. 결과는 세이프. 누구할 것 없이 동물적인 감각과 판단, 적극적인 플레이로 순식간에 3점을 가져왔다. 그렇게 상원고는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불과 10초 안에 3점으로 경기를 뒤집어버린 것이었다.

만세를 외친 김승관 감독

전주고 선수단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3루 작전 코치 자리에서 손수 작전 전달을 하던 김승관 감독은 역전 주자가 홈을 파고들 때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쳐들고 주자와 함께 홈으로 달렸다. 평소 점잖기 그지없는 그였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김승관 감독이 맞나?" 경기를 지켜보던 어느 야구인의 말이었다.

한 대 '좌(左)승엽 우(右)승관'으로 불려지던 김 감독의 진짜 커리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실력 위주의 라인업을 구성해 전국대회에 학교와 동문, 지역의 명예를 걸고 싸우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였다. 세상 일이 사람 뜻대로만 될까마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게 아닐까. 하늘은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김 감독에게 이호준이라는 걸출한 해결사를 내려줬다.

경기 후 이호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청룡기도 청룡기지만 1학년인 이호준이 3학년이 되는 2년 뒤, 상원고 100주년이 되는 해에 그가 어떤 활약을 할지 학교 관계자와 동문은 물론 아마 야구팬들까지 한껏 기대에 부푼 분위기다. 김승관 감독의 결단이 낳은 성적 이상의 성과다.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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