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 외치면 범법자? 기자회견과 미신고집회, 그 모호한 경계

입력
2021.07.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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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집회 신고·처벌조항에 5번째 합헌 결정 불구
"구호·피케팅 이유로 미신고 처벌은 과잉규제" 논란

지난달 1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선 ‘일본 강제징용 손해배상 각하’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 회원 10여 명이 취재진 앞에서 애국가 제창, 규탄문 낭독 등 정해진 식순대로 행사를 진행하던 도중, 진행자는 돌연 "구호 제창 순서는 건너뛰겠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중 구호 제창을 하면 미신고 옥외집회로 간주돼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경찰의 제지 때문이었다. 똑같은 행사인데 규탄문을 혼자 읽으면 '합법', 함께 구호를 외치면 '위법'이란 논리다. 결국 회원들은 예행연습까지 했던 '판사를 탄핵하라' 구호를 외치지 못했다.

집회와 기자회견을 구분하는 사법적 판단 기준은 십수 년간 해묵은 논란거리다.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은 ‘옥외집회나 시위를 주최하려는 자는 최소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고, 위반 시 징역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집회는 교통 장애, 소음 발생 등을 유발할 수 있어 경찰이 미리 개최 사실을 알고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입법 취지다. 반면 기자회견은 그럴 우려가 없다고 보고 신고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제는 집회와 기자회견을 가르는 기준이 늘 분명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사법당국은 판례 등을 근거로 기자회견에서 구호 제창, 피케팅, 퍼포먼스를 하면 '기자회견을 빙자한 미신고 집회'로 간주하며, 종종 이를 수사해 처벌하기도 한다. 시민사회와 법조계에선 “법률상 신고의무 대상인 집회의 개념 자체가 불분명한 데다, 실질적인 위험 발생 우려가 없는데도 미신고를 이유로 처벌하는 건 과잉 규제”라고 반발한다.

집회와 기자회견, 모호한 경계

사법부에서도 판단은 엇갈린다. 대법원은 통상 구호 제창 등 단체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 활동이 있었다면 형식상 기자회견일지라도 실상은 집회라며 처벌해왔다. 그러나 하급심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차원에서 공공질서를 침해할 우려가 없었다고 판단된다면 문제 행위가 있었어도 처벌하지 않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일례로 2014년 6월 대전지검 정문 앞에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던 단체 회원들은 집시법 위반으로 이듬해 기소됐다. 이들은 “고발장 접수 전 기자회견을 한 것뿐”이라 항변했지만, 검찰은 행사에서 현수막과 피켓 5개가 사용되고 구호 제창이 이뤄진 만큼 미신고 집회라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 역시 피고인들에게 각각 50만~2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판결은 달랐다. 대전지법 형사항소4부(당시 부장 김선용)는 “공공질서 유지 등 사전신고제 취지를 감안하면 옥외집회 해당 여부를 따질 땐 '이익충돌의 예방 필요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쉽게 말해, 해당 모임이 심각한 교통장애나 시민 불편을 일으킬 수 있어 경찰이 사전에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 위에서 재판부는 당시 기자회견이 10분만 진행됐고 큰 소음이나 통행 장애도 발생하지 않은 점에 비춰 집회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케팅과 구호 제창에 대해서도 “기자회견을 함축·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의사표현 자유의 범주에 속한다”고 강조했다. 이 판결은 검찰이 상고를 취하해 그대로 확정됐다.

사법부 내부 판단도 엇갈려

기자회견과 집회 사이에서 심급마다 판결이 엇갈린 사례는 또 있다. 2016년 12월 탄핵정국 당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사퇴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가 미신고 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전 동국대 총학생회장 안모씨도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가 2심에서는 무죄를 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당시 차량 통행·도보상 장애가 발생하지 않아 참가자와 시민 간 이익충돌 상황이 없었다”며 “피켓을 사용했거나 구호를 외쳤다는 사정만으로 집시법이 정한 신고 대상이 되는 옥외집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해 6월 이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구호 제창 등이 당시 취재를 온 기자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불특정 다수 시민에게 전달됐다”는 게 이유였다. 대법원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공공 안녕질서에 위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전 예방의 필요조차 없었다고 볼 순 없다”고도 밝혔다.

안씨 측은 재상고를 포기해 벌금 50만 원을 부과받았다. 다만 이들은 지난달 22일 “불명확한 집회 개념 탓에 옥외기자회견, 플래시몹 등도 모두 사전신고 대상이 되는지 불분명해 시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고, 수사기관의 선별적 수사·기소에 노출돼 있다”며 집시법상 옥외집회 관련 신고조항(6조 1항)과 처벌조항(22조 2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재판관 한 명 차로 '합헌' 판단

안씨가 헌법소원을 낸 지 이틀 뒤인 지난달 24일, 공교롭게도 헌법재판소는 다른 사건을 통해 해당 조항에 대한 법적 판단을 내렸다. 결론은 사전신고 조항은 재판관 5(합헌)대 4(위헌), 처벌조항은 4(합헌)대 5(위헌)로 ‘가까스로 합헌’이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리려면 최소 6명의 재판관 의견이 모여야 한다. 헌재는 이전에도 네 차례 같은 집시법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에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다수 의견은 “집시법은 신고절차만 밟으면 일반·원칙적으로 집회를 보장한다”는 등 과거와 같은 이유로 합헌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낸 이석태 재판관 등은 “집회 목적·방법·형태 등에 비춰 제3자 법익과 충돌하거나 공공 안녕질서가 침해될 개연성, 예견가능성이 없는 경우 사전신고 의무를 부과할 실질적 필요가 없다”면서 “그럼에도 예외 없이 의무를 부과하고 처벌하는 건 집회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현장에서도 거듭된 논란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다. 경찰 관계자는 “기자회견에서 구호 제창 등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문제삼지는 않는다"며 "다만 경고에도 불구하고 과한 행위가 이어지면 대법원 판례에 따라 사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시민단체 등은 “실제 위험성에 대한 판단은 없이 일률적인 처벌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비판한다. 향후 헌재가 안씨 사건을 통해 6번째 판단을 어떻게 내릴지 주목된다.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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