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국희 "'레드북'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위로"

입력
2021.07.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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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초연 때부터 참여… 다음달 22일까지 공연

2017년 초연된 '레드북'은 국내 창작 뮤지컬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과 견줘도 빠지지 않는 무대 연출과 참신한 소재, 톡톡 튀는 넘버 삼박자가 어우러지면서 공연 때마다 흥행에 성공했다. 물론 기저에는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이 있다. 특히 김국희(35)는 '레드북' 초연 때부터 세 번째 시즌을 맞은 올해까지 한 번도 출연을 빠트린 적 없는 터줏대감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레드북'은 야한 소설을 쓰는 작가 안나가 여성을 둘러싼 보수적인 사회적 편견과 맞서고,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이야기다. 김국희는 이 작품에서 1인 2역으로 도로시와 바이올렛을 맡았다. 도로시는 여성들의 문학활동 모임 '로렐라이 언덕'의 회장이고, 바이올렛은 안나의 보살핌을 받았던 노부인으로 안나 덕분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인물이다.

줄거리 때문에 '레드북'을 처음 접하는 관객은 페미니즘적 메시지에 주목하기 쉽다. 하지만 김국희는 "꼭 페미니즘의 색감으로만 보지 않아도 '레드북'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이 많다"며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레드북' 공연장 인근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김국희는 "주인공 안나는 창의적인 예술성을 가졌지만 당시 사람들이 정한 잣대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데, 극은 그런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페미니즘을 넘어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에 대한 의미를 역설하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김국희는 20대 때부터 대학로 연극판에서 '할머니' 전문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레드북'에서 바이올렛은 좋아하는 이에게 제대로 애정 표현을 못하는 소극적인 여성을 대변하는 할머니다. 하지만 김국희만의 맛깔스러운 위트가 더해지며 입체적으로 변한다. 김국희는 "메마른 가지 같았던 사람이 사랑에 눈뜨고 회춘하면서 바이올렛 색깔을 띠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로시의 경우 진취적인 여인을 상징한다. 김국희는 "대본에는 도로시의 인물 설명으로 '음울한 카리스마를 가진 회장'이라고 쓰여 있는데, 무뚝뚝하면서도 극중 재미와 위로를 책임지는 어려운 캐릭터"라며 "시대 배경을 감안해 너무 괴짜 같지도 평범하지도 않게 연기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극에서 무표정한 도로시가 안나와 "아찌르르" 하고 사마귀 흉내를 내며 짝짓기를 묘사하는 장면은 김국희표 코미디의 백미로 꼽힌다.

김국희는 올해 처음 방진의 배우와 같은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경쟁심리가 들 법도 한데 김국희는 "역할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내 편을 만나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출연하지 않는 날 객석에서 '레드북'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라고 덧붙였다. 무대 위에서는 놓치고 있었던 퍼즐을 맞출 수 있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레드북'은 다음 달 22일까지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최근 김국희는 뮤지컬과 연극('태일')뿐만 아니라 드라마('스위트홈'), 영화('유열의 음악앨범') 등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김국희는 "일부러 여러 장르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내 공연을 본 제작자들이 먼저 작품을 제안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국희는 "내 정체성은 공연인이지만, 남은 생에 딱 하나의 장르만 할 수 있다면 앞으로는 영화를 더 찍어 보고 싶다"고도 했다.

김국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 냄새 나는 인물들을 주로 연기해 왔다. 김국희는 "처음에는 배우로서 개성 있는 얼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속이 많이 상했는데, 지금은 여러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라 믿는다"고 했다. "'레드북'이 끝나면 다른 작품에서 전혀 안 해본 역할들을 맡게 됩니다. 고학력 박사도 연기하고요. 액션도 찍는답니다. 기대해 주세요!"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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