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광역 지방선거의 승자는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새로 출범한 집권 여당도, 6년 전 급부상하며 정치권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극우 정당도 아니었다. 지역 민심은 기성 정당 연합의 손을 들어줬다. 내년 4월 대선을 10개월 앞두고 치러진 ‘바로미터’ 성격의 이번 선거에서 차기 대선 유력 주자들이 이끄는 양당이 모두 참패함에 따라, 향후 엘리제궁 주인 자리를 둘러싼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과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 간 경쟁 구도도 안갯속에 빠져들게 됐다.
27일(현지시간) 프랑스24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2차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 광역지자체(레지옹) 13곳 가운데 공화당(LR) 등 중도우파 연합이 7곳, 사회당(PS) 등 중도좌파 진영이 5곳을 각각 장악할 게 확실시되고 있다. 지중해 섬 코르스에서는 지역정당이 승기를 꽂을 전망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당 ‘전진하는 공화국(LREM)’과 르펜 대표의 국민연합은 결국 단 한 곳의 광역단체장도 배출하지 못했다. 두 정당의 전국 평균 득표율도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전진하는 공화국은 7%로 가장 낮다. 심지어 지난 1차 투표 당시 전국에서 기록한 성적(12%)보다도 떨어졌다. 마크롱 대통령이 민심을 얻기 위해 직접 지방 순회까지 나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국민연합의 성적표(20%)도 처참하긴 마찬가지다. 범우파 연합(38%)이나 범좌파 연합(34.5%)에 한참 못 미치는 득표율이다. 국민연합의 전신인 ‘국민전선’이 2015년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키며 주류 정치계에 충격을 줬던 것과 비교하면, 인기가 뚝 떨어진 셈이다. 특히 이번 선거 전 각종 여론조사에선 국민연합이 최소 6개 지역에서 승리할 것으로 점쳐지면서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는데도 막상 투표함을 열어본 결과는 딴판이었다. 실망감이 더욱 커진 건 당연하다.
내년 4월 대선도 혼돈에 빠지게 됐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간 차기 대선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으로 평가됐다. 지방선거이긴 해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지는 마지막 전국 단위 선거인 만큼 민심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선 도전 가능성이 큰 마크롱 대통령과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르펜 대표 간 대리전 성격도 있어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으나, 참패를 맛본 두 사람 모두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특히 르펜 대표의 상처가 더 크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 승리를 발판 삼아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겠다고 장담해 왔지만, 이 같은 계획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됐다. 블룸버그통신은 “마크롱과 르펜 모두 참담한 결과를 기록하면서 대선 전망은 한층 더 불투명해졌다”고 평가했다.
해외 주요 언론들은 내년 대선 양강 구도에도 균열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제3의 인물이 급부상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양쪽 모두 단 한 곳도 자리를 얻지 못하면서 프랑스 대선 판도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며 범보수 진영의 자비에 베르트랑 오드프랑스 광역의회장을 대선후보 유력 주자로 꼽았다. 실제 선거에서 승리한 중도우파는 그를 중추로 삼고 앞으로 10개월 남은 대선까지 동력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날 베르트랑은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극우 진영의 부상에 제동을 걸었다”며 대선 승리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