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인 A씨는 2007년 대학 입학 뒤 여러 선교단체를 통해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비폭력주의의 씨앗을 키워나갔다. 고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획일적 입시교육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또래 문화에 반감을 느끼도 했던 A씨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10년 정도 '이스라엘의 무력침공 반대 및 팔레스타인 평화 염원 긴급기도회' '한국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 반대 시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 '수요시위' 등에 참여하면서 그의 반전사상은 더욱 확고해져갔다.
A씨가 가진 신념의 이면엔 기독교 교리와 페미니즘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교 시절 '정의와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게 됐고, 대학 땐 '다양성과 평등'을 핵심 가치로 두는 페미니즘에 심취한 영향이 컸다. A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 페미니스트'(사회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요소를 성소수자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사람)로 규정하고, 각종 강연과 논문 발표, 저서 출판 활동을 이어갔다. 반전단체에서도 7년간 활동했던 A씨는 2017년 11월, 현역 입대를 거부하면서 병역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A씨가 '정당한 사유' 없이 병역을 기피했다고 보고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 판단은 달랐다. "A씨가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과 소수자를 존중하는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비폭력주의와 반전주의를 옹호하게 됐고, 그에 따라 병역의무 이행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24일 대법원도 A씨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2심의 판단을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양심적 현역 입대 거부자'에 대한 첫 사례였다.
A씨의 판결을 두고 법조계에선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분위기다. 최근 A씨처럼 개인의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무죄 선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게 무죄를 선고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정 종교의 신도가 아닌 병역 거부자에게도 '거부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추세다.
대법원은 지난 2월 '타인 생명을 빼앗는 군사훈련에 참석할 수 없다'는 윤리적 신념에 따라 예비군 소집에 응하지 않은 B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비종교적 사유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첫 확정 판결이었다. B씨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처럼 특정 종교의 교리에 따라 병역 의무를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현역 복무를 거치면서 반전사상이 더욱 확고해진 사례였다. B씨는 예비군 거부로 인해 수년간 조사와 재판을 받은 것은 물론, 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어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진정한 양심은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해야 한다"(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는 기준을 B씨는 충분히 충족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잇따른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으로 병역 기피 현상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다. 하지만 병역거부가 받아들여지는 경우보다 유죄 판결을 받는 사례가 훨씬 많다는 게 대법원 설명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은 피고인들의 생애를 개별적으로 분석해 선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 판례가 다른 사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개별 사건으로 병역 거부 사유의 문이 넓어졌다고 확대해석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병역 거부의 정당성을 가늠할 '양심'의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 법원에선 구체적 소명 자료와 충분한 심리를 통해 내면 깊이 자리잡은 '진정한 양심'의 유무를 판단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병역 기피를 위한 '타협적이고 전략적인 양심'을 걸러내기 위해서다. 대법원은 지난 3월 비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파기 환송하면서 “병역법 위반의 유무죄를 가리기 위해선 피고인이 양심의 구체적 내용과 양심의 형성 동기 및 경위를 밝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 역시 '진정한 양심'을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한 뒤 "병역거부 사유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의 존부 판단은 양심의 내용의 타당성에 따라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A씨의 무죄 확정에 관련 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쟁없는세상, 군인권센터,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참여연대 등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변화가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A씨 변호를 맡았던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면 무죄 판단을 받지 못해 갈 길이 멀다고 봤는데, 오늘 판결로 변화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