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부천필)는 독일권 정통 클래식에 강한 면모를 보였죠. 앞으로는 미처 소개되지 못한 러시아, 영국 등 다른 음악권 작품들을 선보일 생각이에요. 특히 한국 고유의 음악을 악단의 중심 레퍼토리(곡목)로 만들 계획입니다."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등 음악계 저변을 개척하는 데 앞장섰던 부천필이 또 한번 변화를 예고했다. 그 선두에는 이달 초 새로 취임한 장윤성(58) 상임지휘자가 있다.
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장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도시의 상징이 되기는 쉽지 않은데, 부천필은 부천을 홍보하는 마스코트의 성격이 강하다"면서 "연주 실력뿐 아니라 탄탄한 기획·행정력까지 갖추며 명성을 쌓아온 결과"라고 말했다. 울산과 창원, 대전 등 굵직한 도시의 시립 오케스트라를 상임으로 지휘한 경력이 있는데도 그는 "이번에 드는 지휘봉의 무게가 특히 남다르다"고 했다.
부천필의 세 번째 상임지휘자로서 3년간 악단을 이끌 선장의 목표는 뚜렷하다. 우선 레퍼토리의 다각화. 장 지휘자는 "영국의 윌리엄 월튼이나 본 윌리엄스처럼 작품성이 있는데 연주되지 못한 곡들을 소개하고 싶고, 러시아 음악도 흔히 건드리지 않는 작품들을 파볼 것"이라고 했다. 그 일환으로 장 지휘자는 25일(부천시민회관), 30일(롯데콘서트홀)로 예정된 자신의 취임 연주회에서 이탈리아 작곡가 알프레도 카셀라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한다. 4년 전 그가 국내 초연한 뒤 거의 연주되지 못한 작품이다.
한국적인 레퍼토리에 대한 관심도 많다. 우선 '한국'이라는 부제가 붙은 펜데레츠키 교향곡 5번을 적극 연주하고, 음반으로도 남길 계획이다. 민요 '새야 새야'의 선율이 활용된 단악장 곡이다. 장 지휘자는 "이 교향곡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녹음된 앨범이 없다"면서 "작곡된 취지를 살리려면 입체적(서라운드)으로 음향을 녹음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 지휘자는 2023년 개관 예정인 클래식 전용 공연장 부천아트센터에서 녹음을 구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헤르베르트 빌리가 한국의 '정(情)'을 주제로 쓴 관현악곡을 부천필이 초연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깨어나라' '자비심' 등 제목이 붙은 8개의 모음곡인데, 2004년 내한한 빌리 작곡가의 한국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다. 장 지휘자는 "작곡가의 계약에 따라 이 곡의 초연은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맡게 되는데, 10여 분 길이의 압축 버전"이라며 "40분 길이의 전곡은 부천필의 연주로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장 지휘자는 "펜데레츠키 교향곡 5번과 빌리의 곡은 한국 악단이 연주했을 때 강점이 있고, 그 해석도 세계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면서 "기회가 닿는다면 이들 곡을 함께 앨범에 담아내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부천필 상임지휘자로서 데뷔 무대인 취임연주회에서는 카셀라 교향곡과 함께 생상스의 교향곡 3번이 연주된다. 협주곡 없이 교향곡으로만 구성한 이유는 오케스트라가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2개 교향곡이 모두 오르간을 사용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장 지휘자는 "새로 짓는 부천아트센터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다"며 "취임연주회는 내후년 부천필 프로그램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예고편"이라고 설명했다.
카셀라 교향곡 2번의 악보 끝에는 단테의 '신곡'에 쓰인 문구가 적혀 있다. '잔인한 바다를 뒤로하고 더 나은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다.' 최근 재단법인화 문제로 불거진 부천필의 내홍과 코로나19로 인한 음악계 침체라는 갑갑한 시간을 뒤로하고 장윤성호 부천필이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