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늪에서 신속히 벗어나기 위해 미국이 밀어붙였던 ‘백신 접종 속도전’에 막판 제동이 걸렸다. 흑인들의 백신 접종률이 예상보다 턱없이 낮은 탓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예고한 ‘코로나 독립 선언의 날(7월 4일)’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이 같은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목표 달성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8일(현지시간) 외신과 비영리단체 카이저패밀리재단(KFF) 조사를 종합하면, 미국 내 18세 이상 흑인의 백신 접종률은 다른 인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지난달 말까지 코로나19 백신을 최소 한 차례 이상 맞은 흑인은 29%에 그쳤다. 백인(43%)과 아시아계(54%)뿐 아니라,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낮은 접종률을 보였던 히스패닉계(32%)와 비교해도 낮은 수치다.
더딘 흑인 백신 접종은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의 경우, 인구 10명 중 6명(62.8%)이 흑인이지만 이들의 접종률은 절반에 못 미치는 43.6%에 불과하다. 유색 인종 비중이 큰 뉴욕시도 흑인의 25%만 주사를 맞은 상태다.
이 같은 현상은 미 연방정부 보건정책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에다, 낮은 백신 접근성까지 맞물린 결과란 분석이 나온다. 1930년대부터 40여 년간 보건당국이 흑인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비윤리적 실험’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은 탓에 선뜻 접종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1호 접종자’를 자메이카 출신 흑인 간호사로 선택할 정도로 공을 들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흑인 사회 내에서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노력마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낮은 흑인 접종률은 바이든 행정부에도 골칫거리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다음 달 4일까지 성인 70%(1억 8,000만 명)가 코로나19 백신을 최소 한 번 이상 맞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목표 달성을 위해 복권과 마리화나까지 ‘당근’으로 내걸 만큼, 공격적인 접종 캠페인을 펼쳤다. 그럼에도 접종자 수는 연일 줄고 있다. 4월 중순 정점(340만 명)을 찍었던 ‘1일 평균 접종자 수’는 이날 100만 명으로 급감했다. 흑인 비(非)접종자들이 주사를 맞지 않으면, 목표 달성은 한층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애가 탄 백악관은 흑인 커뮤니티 집중 공략에 나서는 모습이다. 흑인들의 ‘사랑방’ 격인 이발소ㆍ미용실과 제휴를 맺고, 이를 백신 접종 예약 거점으로 삼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퍼스트레이디인 질 바이든도 최근 뉴욕 할렘 교회에 위치한 백신 접종소를 찾아 접종을 독려했다. 흑인계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조만간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흑인 거주 비율이 높은 지역을 찾아 홍보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또 다른 보건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흑인 접종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의 코로나19 자문위원인 셀린 건더 박사는 “흑인 백신 접종에 진전이 없다면 가장 취약한 공동체가 앞으로도 계속 고통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의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와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하는 미국 전체 분위기와는 달리, 특정 인구집단에선 감염병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폴리티코는 “지난달 1일 이후 50일간 워싱턴 지역 코로나19 신규 확진자의 80%가 흑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