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의 사진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말'을 한다

입력
2021.06.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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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박태홍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는 광주 출장 명령을 받고 열차에 올랐다. 사이비 기자나 프락치일 거라 의심하는 시민군에게 폭행당하고 카메라까지 뺏기는 등 우여곡절 끝에 취재를 시작한 그는 목숨을 걸고 현장에 뛰어들어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역사의 순간들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엿새 뒤인 27일 진압군은 도청 탈환 작전을 펼쳤다. 도청 앞에선 군인들이 바닥에 쓰러진 청년들을 군홧발로 눌러 제압한 뒤 포승줄로 묶어 연행하고 있었고, 도로 위엔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시민들이 쓰러져 있었다. 5월의 햇살 따뜻한 봄날, 박 기자는 피살된 시민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압군을 한 프레임에 담았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날의 서늘하고 끔찍한 상황을 고스란히 전한다.

‘나는 사진기자입니다’는 박 기자가 50년간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촬영한 수많은 사진 중 110여 점을 엄선해 수록한 사진집이다. 책의 중심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 광주 인근 송정리역에 막 도착해 찍은 사진부터 전남도청을 장악한 시민군이 집회를 하는 현장, 영화 ‘택시운전사’로 잘 알려진 힌츠 페터 독일 기자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를 촬영하는 모습, 시민들이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참혹한 현장 등을 기록한 사진들이 수록됐다.

1972년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화재사건 때 유리 창틀에 끼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조수아씨(당시 6세)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주목할 만하다. 53명이 사망한 대참사의 현장을 그 어떤 글보다 생생히 설명한다. 이 사진은 세계보도사진전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다. 때론 장문의 글보다 사진 한 장이 전하는 울림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사진들이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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