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프티~엠프티, 배터리 이즈 로(Empty~empty, Battery is low), 내 배터리는 1%." 요즘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연습실에 흘러나오는 K팝 '배터리 1%'의 후렴구다. 여자 3명과 남자 1명으로 이루어진 혼성 그룹은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폼 나게 노래한다. 길을 걷다 익히 들어봤을 것 같은 이 노래는 놀랍게도 독일 작곡가 벤 뢰슬러의 곡이다. 혼성 그룹은 현재 국립극단 시즌 단원으로 활동 중인 배우들이다. 이 상황은 박본의 신작 '사랑 Ⅱ'의 연습 현장이다.
1987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 겸 연출가 박본은 국립극단 첫 데뷔 무대를 준비 중이다. 그는 한국의 가장 핫한 문화 트렌드인 K팝과 K드라마를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시도한다. 옛 서독의 수도 '본'에서 본명을 따온 그는 K팝과 K드라마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의 이면을 읽어낸다. 다양한 장르를 통합해 그것을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갈고 닦아내는 능력이 그가 가장 최근에 발견한 한국이다. 사랑의 후속편이라는 의미로 '사랑 Ⅱ'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공연에서 자연스레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고 K드라마의 구조가 반영된다. 극중 배경은 지구의 핵으로, 율리아 누스바우머가 디자인한 세트에는 지상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식물을 재배하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지난달 14일에 첫 연습을 시작하고도 현재까지 완성된 대본이 없다. 아직 손에 대본을 쥐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배우들은 초조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배우와 스태프 모두가 참여하는 긴 리서치 기간은 이번 작업의 핵심 연습이다. "작품 창작에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박본 연출의 신조다.
연습이 시작되기 전 '사랑의 불시착'을 보라는 숙제가 있었다. 박본은 작가적 입장에서 '사랑의 불시착'이 K드라마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고 했다. 오글거리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로, 갑자기 스릴러로 넘어가더니 비극적인 상황까지 이어지는 장르 간의 변화무쌍함이 독일인의 시선에서는 너무 새롭고도 재미있는 포인트라는 것이다.
또한 독일 드라마에서는 음식이 등한시되는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는 음식이 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만큼, 배우 및 스태프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 15가지를 적어 와서 발표하기도 했다. 감자탕을 가장 좋아한다는 연출은 나열되는 음식 리스트에 쉽게 공감했다. 그리고 한 배우가 상기된 표정으로 남대문에 있는 갈치조림 집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늘어놓자, 그는 곧바로 지금 한 이야기를 적어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유는 작품 속 캐릭터들이 작가의 머릿속이 아닌 연습실에서 매일 마주치는 배우들을 알아가면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본이 리서치에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지금 다루고 있는 소재의 본질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본질 찾기는 곧 작품의 콘셉트와 연결되면서 그가 공연을 풀어가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베를린의 유서 깊은 공연장 폭스뷔네에서 2018년 초연한 '30억 자매'는 '오페라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오페라'라는 콘셉트와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에서 출발했다. 모스크바로 떠나려 하지만 결코 떠나지 못하는 세 자매의 이야기를 영화 아마겟돈과 엉뚱하게 연결시켰다. 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혜성을 파괴할 계획만 세우다 결국 혜성이 지구를 빗겨간다는 해프닝을 통해 원작의 본질인 부조리한 실존을 패러디했다. 오케스트라와 서곡을 비롯해서 오페라의 형식적 구색도 갖췄다. 음악은 '사랑 Ⅱ'의 작곡가이기도 한 벤 뢰슬러가 맡았다.
결국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 진출했다는 김시스터즈부터 현재의 K팝을 패러디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매드몬스터에 이르기까지 연습실에서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깊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한국과 독일의 역사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면서 접점들이 생겨나고 있다. 국립 극단 무대 위에 과연 어떠한 아이돌 그룹이 탄생할지, 그들이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감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