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들에서 이런 주장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빨간 약을 먹고 가상공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듯, 백인 남성이 여성 특권에 억눌린 현실을 알아차리자는 목소리다. 이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SNS 게시판의 이름이 레드필(red pill·빨간 약)인 까닭이다.
고전학자 도나 저커버그는 온라인의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를 묶어서 레드필 커뮤니티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우파세력과 페미니즘에 대응하는 남성들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여성을 정복 대상으로 삼는 픽업 아티스트(pickup artist)와 여성에게 희생당하지 않겠다고 결혼을 거부하는 남성들도 합류한다.
레드필은 억압의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폭력 희생자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다. 남성은 교도소 재소자 인구의 90%를 차지한다. 미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남성 자살률은 여성보다 3배 정도 높다 등등. 이들은 백인 남성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정상의 오류’라고 여긴다. 남성 집단 가운데 탁월한 소수가 이룩한 성취로 남성 전체를 평가해 나타난 오류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레드필은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생계를 책임진다는 생각에 고통받는 남성들을 가부장제로부터 풀어주려고 노력했는가? 여기서 저커버그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랬다면 고전학자가 그들을 분석할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신 레드필은 페미니즘과 진보주의로 화살을 돌린다. 소수 선지자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좌표를 찍는다. 그러면 동조자들이 몰려들어 SNS 메시지나 이메일로 괴롭힘을 시작한다. 때로는 강간하겠다는 위협도 뒤따른다.
여성혐오는 레드필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여성이 자신에게 행동을 강요했다는 인식 탓이다. 유명 픽업아티스트 블로그 ‘리턴 오브 킹스’의 한 게시물은 그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내가 너희를 덜 존중할수록 아랫도리가 젖었다. 너희는 친절함을 타고났던 내가 점점 더 거만하고 재수 없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고전학자가 레드필 분석에 뛰어든다. 레드필이 자신의 정당성을 그리스 로마 고전들에서 찾기 때문이다. 한 유명 픽업아티스트는 로마 작가 오비디우스를 종종 인용하는데 그가 1세기경 펴낸 ‘사랑의 기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녀는 주지 않는다. 그녀가 주지 않더라도 가져라! 그녀는 싸울 것이다. (중략) 싸우면서도 그녀는 정복당하기를 원한다.”
오비디우스의 시는 ‘여성은 원래 걸레로 여겨지기 않으려 성적 접촉을 멈춘다’는 전언으로 현대로 옮겨진다. 픽업아티스트들은 이를 ‘최후의 저항’이라고 부른다. 강간을 부추기고 정당화할 위험이 있는 표현이다. “’안 돼’ 그녀의 셔츠를 벗길 때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속뜻은 ‘더 흥분시켜야 돼!” “팬티를 벗길 때 ‘안 돼’라고 그녀가 말하는 속뜻은 ‘지금 포기하지 마!’”
저커버그는 레드필이 고전들을 무기로 악용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그들의 인용이 온라인 공간에서 놀이문화로 재생산돼 퍼지는 상황을 경고한다. 거기엔 고전학자들이 오랜 세월 원문에서 찾아낸 이해나 연구성과가 없다. 2,000년 전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당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이해가 없다. 원문의 참뜻을 알고 퍼뜨리는지도 의문일뿐더러 당시에 여성 혐오가 만연했어도 그 사실이 현대의 여성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레드필은 바다 건너의 남 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한국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벌어졌거나, 벌어질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저커버그가 전한 백인 우월주의자의 전언은 섬뜩하다. 여성을 향한 칼날은 인종으로도 겨눠질 수 있다. “나는 남성이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다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여성이 그런다고 하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궁은 우리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그 자궁은 여성의 것이 아닌 여성이 속한 사회의 남성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