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그 꽃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처음으로 봤던 나이와 심장을 되찾는다. 멀리 울타리 너머로 그 꽃의 하얗고 투명한 베일이 얼핏 보이면, 그 시절 어린아이였던 내가 되살아난다. 다른 꽃들이 내 안에서 일으켰던 약하고 벌거벗은 느낌이, 어떤 대연회에서 지친 목소리의 늙은 테너가 옛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를 지탱해주고 풍부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합창단원들의 산뜻한 목소리처럼, 더 오래된, 더 어릴 적에 받았던 인상이 산사나무에 더해져 강렬하게 나타났다. 그러니 내가 산사나무를 보고 생각에 잠긴 듯 걸음을 멈춘다면, 그것은 나의 시선만이 아니라 내 기억이, 나의 모든 주의가 걸려 있는 것이리라.” (마르셀 프루스트 산문 ‘봄의 문턱에서’ 중)
20세기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지병인 호흡기 문제로 빛과 향기와 단절된 채 코르크로 밀폐된 방의 침대에 누워 글을 써야 했다. 그런 프루스트가 쓴 위의 산문은 처음 사랑하는 꽃을 만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향기와 색채를 생생하게 불러들이는 글이다. 아홉 살 때 부모님과 불로뉴 숲을 산책하다 발작한 천식 증세는 그를 평생 괴롭혔고, 꽃가루가 분비되는 봄이면 언제든 천식으로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과 보낸 다정한 시간 그리고 꽃에 대한 그리움만은 떨쳐낼 수 없었던 프루스트의 심경이 한 편의 산문에 담겨 있다.
최근 출간된 ‘가만히, 걷는다’는 프루스트를 비롯해 귀스타브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 샤를 보들레르, 알퐁스 도데, 앙투드 생텍쥐페리, 프랑수아즈 사강,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근현대 프랑스 작가 스물한 명의 산문을 한데 모은 책이다. 출판사 봄날의책이 ‘천천히, 스미는’(영미 산문선), ‘슬픈 인간’(일본 산문선)에 이어 세 번째로 펴내는 세계산문선 시리즈다.
해외 작가들의 산문을 하나로 엮은 선집은 이미 많지만, 이 세계산문선 시리즈는 역자가 직접 선집에 포함될 글을 하나하나 고심해 골랐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가만히, 걷는다’ 역시 번역을 맡은 신유진 작가가 10개월여의 시간을 들여 스물한 명 작가의 전집과 도서관을 헤맨 끝에 총 서른여섯 편의 산문을 그러모았다.
그 결과 부랑자와 나눈 짧은 우정을 여름의 열기와 빗소리에 기대 옮기는 프랑수아즈 사강, 글을 쓰기 위해 도시로 떠나온 가난한 청년 알퐁스 도데의 내밀한 목소리를 담은 아름다운 글들을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게 됐다. 추천사를 쓴 백수린 소설가의 말처럼 “호화로운 선물”과도 같아 아껴 읽게 되는 책이다.
봄날의책이 ‘가만히, 걷는다’와 함께 펴낸 미야모토 테루의 산문집 ‘생의 실루엣’ 역시 작가의 소설을 사랑했던 독자들에게 깜짝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미야모토 테루는 다자이 오사무상,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 일본 순수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작가다. 국내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의 원작이 되는 동명의 단편소설 작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환상의 빛’, ‘금수’ 등의 서정적인 작품으로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고 있다.
이번 에세이집은 테루가 교토의 한 요릿집에서 펴내는 잡지 ‘소유’에 연재했던 것들을 엮은 것이다. 기껏해야 3호까지 내고 폐간될 것이라 생각해 요릿집 주인의 권유를 받아들였지만, 테루의 예측과 달리 잡지는 10년이나 이어졌다. 그렇게 1년에 두 편씩 10년에 걸쳐 쓴 글을 모았다.
책은 특유의 섬세한 시선과 유려한 문장 안에 생의 통찰을 담아냈던 테루의 소설과 같은 결을 지니고 있다. 우연히 마주쳤던 이복형제의 뒷모습, 부모를 잃은 뒤 이웃 오뎅집 부부에게 입양된 소년의 얼굴... 대단한 사건이나 인물은 아닐지라도, 우리 곁의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에 얽힌 일화를 포착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편의 수필로 완성시킨다. 이 봄, 생의 실루엣을 그린 스물두 명 작가들의 산문과 함께 가만히,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