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호랑이’로 불린 윤석헌 전 금융감독원장이 물러나자, 금융권에서는 윤 전 원장 재임 시절 권고한 금감원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차기 금감원장도 아직 결정되지 않으면서, 키코·5대 사모펀드 사태 마무리 등 금감원의 중점 추진 과제 또한 표류할 위기에 처했다.
11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옵티머스 펀드 판매사인 NH투자증권은 ‘계약 취소에 따른 전액배상’ 권고를 내린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 권고를 불수용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지난달 6일 분조위 결정 이후 투자자 신뢰 회복 등을 이유로 NH투자증권이 권고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거론됐지만, 이달 7일 윤 전 원장이 퇴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NH투자증권은 분조위의 ‘계약 취소' 권고안을 수락할 경우, 향후 수탁사(하나은행)·사무관리사(예탁결제원)를 대상으로 구상권 소송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투자 피해자에 대해선 분조위 권고안에 상응하는 별도의 구제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NH투자증권은 회사 이익을 위한 결정일 뿐 윤 전 원장 퇴임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금융권은 윤 전 원장 퇴임이 NH투자증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옵티머스 문제에 적극적이던 윤 전 원장이 퇴임해 후속 제재 절차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만큼, NH투자증권으로선 분조위 권고안을 수용할 실익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윤 전 원장이 중점 추진했던 키코(KIKO) 피해 기업 배상 문제도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키코 사건은 2008년 수출기업들이 환율 변동 위험을 피하고자 가입했다가 오히려 3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윤 전 원장은 취임 직후 키코 사건에 대한 원점 재조사에 착수해 2019년 6개 은행을 상대로 피해기업 4곳에 255억 원(피해액의 15~41%)을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윤 전 원장은 키코 분조위 결정을 그해 가장 잘한 감독정책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분조위 결정을 수락한 은행은 우리은행 1곳뿐이었고, 나머지 은행들은 모두 불수용하는 등 업계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0개 은행이 협의체를 꾸려 자율조정 논의를 이어갔으나 지지부진한 상황이고, 윤 전 원장의 부재까지 겹치면서 향후 논의의 지속 가능성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들이 눈치를 보던 윤 전 원장이 물러났으니 키코 배상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라임·옵티머스 자산운용 펀드 환매 중단 사태 이외에 나머지 사모펀드 사태 해결도 문제다. 지난해 12월 말 기준, 5대 사모펀드 환매 연기 규모는 총 2조8,845억 원인데, 라임·옵티머스를 제외한 헤리티지·디스커버리·헬스케어 펀드의 환매 연기 규모도 9,620억 원으로 33%나 차지한다.
금감원은 애초 올해 상반기 안에 5대 펀드에 대한 제재심의위원회(제재심)를 열고 분조위에 착수할 계획이지만 제재심 절차가 길어지면서 일정 변동이 불가피해졌다. 게다가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 원칙을 강조했던 윤 전 원장이 없는 상태에서 파생결합펀드(DLF)·라임·옵티머스 해결 당시 견지했던 기조를 일관성 있게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정 변동은 있을 수 있으나, 원장 부재 상황과 무관하게 감독규정에 따른 관련 절차를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