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100일… "버틴다, 그래서 이긴다" 미얀마의 희망가

입력
2021.05.1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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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인터뷰로 재구성한 反군부 소방관 탈출기]
민주 인사들 인도 미조람州에 터전 마련 
'군부 저격 플랫폼' 등 투쟁동력 개발 열중

어둠이 짙게 깔린 지난달 30일 새벽. 미얀마인 소방관 카이(22ㆍ가명)씨는 서쪽 국경지대 친주(州) 하카시 외곽에서 낡은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젊은 부부와 대학생 등 9명도 함께였다. 그는 반군 친족방위군(CDF)을 진압하기 위해 군부가 내린 차출 명령을 거부하고 도피하던 중이었다. 동승한 이들도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해 군부의 체포망에 오른 수배자였다. CDF와 교전으로 10여명의 진압군이 숨진 터라 군에 체포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생존을 건 필사의 도주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진행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카이씨는 샛길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인도 접경지대 틀랑고였다고 전했다. 티아우강 너머로 험준한 파옹구이 산맥이 보였다. 인도 국경수비대가 없다는 난민 브로커의 신호에 숨죽여 강을 건넜다. 벌목공 복장으로 갈아 입은 도망자들은 수비대에 들키지 않으려 1박2일 동안 인적이 드문 파옹구이 산간 마을을 돌고 돌았다. 마지막 관문은 평지 진입 분기점에 위치한 반자우 검문소였다. 20달러의 뇌물이 건네졌고, 어느덧 인도 미조람 주도 아이자울로 향하는 국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자울에 도착한 카이씨는 3월 중순 친주를 떠난 같은 소방서 선배부터 찾았다. 이윽고 동료와 맞닥뜨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양곤 반(反)군부 시위를 이끌던 의류 사업가, 만달레이 시민군 순찰대 출신 학생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활동가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미얀마 군부와 가까운 태국이 동부 국경지대를 틀어 막은 탓에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서쪽의 인도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라 했다. 미조람 주정부는 지난달 18일 “오랜 친구인 미얀마인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서신을 중앙정부에 보냈다. 난민 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미얀마 사태에 개입하기를 꺼리는 중앙정부 방침에 개의치 않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망명객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일종의 통보였다.

요즘 카이씨는 미얀마 난민들이 수월하게 미조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 동선을 개척하고 있다. 현재 미얀마인 2,000여명이 안전한 도피처를 찾아 국경 산악지대를 떠도는 중이다. 미조람에 숨어 사는 망명객 3,800명은 인터넷망을 활용한 ‘군부 저격’ 플랫폼을 만드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미얀마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난민들이 들고 온 최신 정보를 토대로 군부의 만행과 현지 실상을 보다 생생히 알리는 게 목표다.

카이씨는 ‘투쟁 전선이 분산되고 국제사회의 중재 가능성도 낮아지고 있다’는 비관적 질문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라며 미얀마 민주화의 미래를 낙관했다. 100일 간 군부 폭압을 견뎌내며 나라 전역에서 투쟁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은 만큼 시민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애초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의 중재가 성공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2월 1일 쿠데타 발발 이후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는 최소 780명의 죽음을 확인했다. 스러진 미성년자도 50여명이나 된다. 진압군이 탈취한 시신을 더하면 민간인 희생 규모는 가늠조차 힘들다. 또 3,826명은 감옥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에 신음하고 있고, 중형 선고를 앞둔 체포자도 4,899명에 이른다. 100일째 자국민 학살을 이어간 군부는 10일에도 “19만명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는 짧은 성명 하나로 세계인의 눈과 귀를 가렸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