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유실 한국 첫 컬러영화, 라이브로 되살렸어요"

입력
2021.04.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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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 결합된 '이국정원'의 전계수 감독


“여보오호~” 옛날 영화 화면을 보며 내는 배우 서현우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영화 ‘별들의 고향’의 유명 대사 “경아, 오랜 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을 연상케 하는 어조였다. 배우들 뒤편에선 폴리 아티스트 박영수가 여러 효과음을 만들었다. 밥솥뚜껑으로 차문 여닫는 소리를 짓고, 마이크 앞 손선풍기에 입김을 불어넣어 차 엔진소리를 흉내 냈다.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연습실은 영화 후시 녹음실처럼 보였다. 29일~5월 2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이국정원’의 연습 모습이었다.

‘이국정원’은 여느 뮤지컬과 다르다. 무대 가운데 스크린에선 1958년에 개봉한 동명 영화가 상영되고, 배우들이 화면에 맞춰 목소리 연기를 한다. 발자국 소리 등 효과음도 관객 앞에서 바로 만들어낸다. 영화와 공연의 결합이다. 연출은 전계수(‘삼거리 극장’ ‘러브 픽션’ ‘버티고’ 등) 영화감독이 맡았다. 여러 면에서 이색적이다. 연습실에서 만난 전 감독은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국정원’은 한국-홍콩 첫 합작영화다. 한국 첫 컬러 영화이기도 하다. 당대 스타 김진규(1923~1998)와 최무룡(1928~1999), 김삼화(1935~2012) 등이 출연했고, 한국의 전창근(1908~1973) 감독과 홍콩 두광치 감독 등이 메가폰을 잡았다. 필름이 유실된 영화로 알려졌는데, 2013년 홍콩 영화사 쇼브러더스 창고에서 필름이 발견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영상을 디지털로 복원했으나 사운드는 되살릴 수 없었다.

전 감독은 영상자료원의 의뢰로 사운드를 공연 형식으로 살려 2014년 5월 첫선을 보였다. 전 감독은 “영화를 처음 보고선 어떻게 공연으로 만들지 막막했다”며 “노래하는 장면을 위해 작사 작곡을 새로 하면서 뮤지컬 요소를 활용해보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전 감독은 ‘내 마음의 태양’ 등 공연에 쓰인 노래 세 곡을 작사했다. ‘이국정원’은 2014년 무주산골영화제와 2015년 충무로뮤지컬영화제 개막작 등으로 몇 차례 선보였지만 정식으로 공연 무대에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 감독은 “예전엔 영화의 의의와 중요성 때문에 유머를 자제했다”며 “이번에 재미있는 대사도 많이 넣고 현대적인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영화는 사랑이야기다. 한국인 작곡가가 어린 시절 헤어진 중국인 어머니를 찾기 위해 홍콩에 왔다가 홍콩 가수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전 감독은 “범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기획됐던 영화”라며 “홍콩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홍콩 풍광이 종종 등장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관계자는 한국 관객을 감안해 비극적 결말을, 홍콩 관계자는 동남아 관객을 위해 해피엔딩을 주장하며 날카롭게 대립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사운드는 사라졌지만 각본 70%가량은 남아 있었다. 전 감독은 대사 30%를 새로 만들었다. 남은 각본도 손을 봤다. 전 감독은 “제 상상력으로 메운 부분, 배우의 애드리브 등을 고려하면 어림잡아 반 정도를 (원작과 다르게)각색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국정원’은 사운드 없는 반쪽 영화였지만 덕분에 21세기 대중과 만날 수 있게 됐다. 전 감독은 “만약 사운드가 있었다면 공연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국정원’은 영상자료원 보관소에 묻혀 많은 사람이 보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공연은 ‘이국정원’을 가치 있게 만든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전 감독은 ‘이국정원’을 바탕으로 8부작 동명 뮤지컬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다. 한국 작곡가와 홍콩 여가수의 사랑을 통해 1960년대 홍콩 쇼비즈니스의 명암을 그린 내용이다. “홍콩 폭력조직 삼합회를 등장시켜 누아르 느낌도 낼 생각”이라며 “아마 ‘이국정원’을 공연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생각지도 못했을 이야기입니다.”라고 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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