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상하다고? 그럴 때 마르크스를 읽어야 합니다

입력
2021.04.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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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대장정 끝에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 완간

“아예 가족사진 콘셉트로 찍어보면 어떨까요.”(고병권)

“책이 주인공이니까 가운데로 모시고.”(심우진)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진짜 가족 같아.”(남미은)

“근데 나는 진짜 가족은 정작 못 챙겼어. 책 시작할 때 아들이 군대를 갔는데 끝나니까 전역해버렸더라고. 하하하.”(선완규)

선완규 천년의상상 대표의 너스레에 세 사람이 자지러졌다. 저자 고병권(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기획자 선완규, 편집자 남미은, 디자이너 심우진(산돌연구소장)은 지난 2년 8개월(출간 기준) 동안 진짜 가족보다 더 가까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2018년 8월 시작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함께 읽어나가는 프로젝트인 ‘북클럽 자본’(12권 완간)을 함께 만들면서다. 두 달에 한 번씩, 출간과 강연을 이어간, 전례 없는 도전을 끝마쳤지만 아직도 서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다. “자식처럼 애틋하죠. 정말 나올 줄 몰랐다니까요.”

빈말이 아니다. 2017년 초 선 대표가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했을 때, 20년지기였던 고병권과 절연할 뻔했다. “처음엔 통으로 한 권인 줄 알았죠. 근데 '월간 윤종신'이 콘셉트란 거야. 거기에 강의까지.” 분이 치밀었다. 그래서 “남의 소중한 인생을 왜 마음대로 쓰려고 하느냐”는 꽤 살벌한 문자까지 보냈다.

하지만 그해 겨울부터 고병권은 '자본'을 펴 들고 마르크스의 그림을 옆에 둔 채 책을 쓰고 있었다. “한번 잘 써볼게요! 보채지 마요!” 애원하는 눈빛을 발산하며. 막 넘긴 책의 교정지, 지금 쓰고 있는 책 원고, 강의록까지 3개의 작업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코로나 사태가 나기 전부터 계속 자가격리 상태였죠.”(웃음)

한 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다시 읽은 사람은 없다는 ‘자본’. 누구나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난공불락의 텍스트. “불온해서” 혹은 “한물가서” 선뜻 집어들지 못했던 범접불가 철옹성. 선 대표가 프로젝트를 기획한 건 대학 때 이루지 못한, ‘자본 독파’의 로망 실현을 위해서였다.

“시중에 나온 '자본'은 요약판 위주로, 최대한 ‘간단하게’가 판을 치더라고요. 이대로라면 '자본'을 영영 읽지 못하겠구나, 정석으로 가보자 싶었죠.” 안내자로 고병권을 택한 건, 무시무시한 ‘자본’을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탁월한 식견에 반해서다. 제도권 학계에서 벗어나 공부 공동체에서 평생 자신만의 철학을 벼려온 ‘거리의 철학자’ 고병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병권이 제안을 수락한 건,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같은 '자본'의 매력에 반해서다. 열 번도 넘게 읽은 ‘자본’이지만, 볼 때마다 새 책을 보는 듯했다. 그는 ‘자본’의 힘을 세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조명’의 역할에서 찾았다. 이번에도 신세계를 열어줬다. “물고기가 물을 보고 새삼 놀라는 느낌처럼, 우리 사회가 지금 얼마나 '이상한 사회'인지 충분히 모르고 있었구나를 깨달았죠.”

가령, 물건은 풍족한데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가난할까. 집에서는 친숙한 AI(인공지능)가 회사로 들어오면 왜 불안해지는가. 주 52시간을 지키고 최저임금을 올리는 일이 왜 투쟁이 돼야 할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착취당하는 세상이 과연 온당한가. '요상한' 세상에 대한 각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책은 형식에서도 ‘낯설게 보기'를 시도했다. 색깔 없이 먹으로 흰색과 검은색만 쓰고, 제목에서 기하학적 이미지를 시도한 건 “책이 말을 걸게끔 하고 싶었다”는 심 디자이너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남 편집자는 처음엔 “’자본’이라면 다들 기겁을 하는데, 가독성마저 떨어지면 누가 보겠느냐”고 결사 반대했지만, 지금은 가장 열성팬이 됐다. “제가 독자를 못 믿었던 거죠.” 남 편집자의 ‘자책(?)’에 고병권은 “시리즈 기획의 안전판이 돼준 최대 공로자”라고 치켜세웠다.

처음엔 저자에게만 인터뷰 요청을 했다. 네 명을 다 해야 한다는 건 고병권의 역제안이었다. “세계적 거장인 켄 로치 감독이 ‘자기는 디렉션만 했다’고 말한 적 있어요. 내 영화, 내 필름이 아니라는 거죠. 전 그 말에 너무 공감해요. 세상에 어떤 것도 사적 소유할 수 있는 건 없거든요. 자본가들은 이렇게 말하죠. ‘저 아파트 내가 지었어! 인부도, 트럭도 내가 샀거든!’ 정말 많은 걸 생략한 거죠.”

‘착시’를 부추기는 건 돈이다. “돈 내고 음식 사 먹으면, 손님들은 식당을 본인이 먹여살렸다고 생각하지만, 식당 주인 덕에 그 손님도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는데 의존성을 자꾸 잊어버리는 게 문제죠."

그러니까 ‘북클럽 자본’은 온전히 네 명의 ‘내 책’이다. ‘모두의 것’이면서도 ‘각자의 것’인. “글, 기획, 편집, 디자인까지 자유로운 개인들이 저마다의 가치를 발휘하면서, 함께 생산한 작품인 거죠. 누구를 데려다, 부리고, 쓰는 게 아니라 '함께 선물하는 관계'가 되는 ‘코뮨’(commune)이 바로 이런 모습이거든요.”

자본주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부당한 처우에도, 때때로 목숨을 내놓고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은 반지하에 살며 끝없이 착취당하던 19세기 영국 노동자와 판박이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병권은 “부의 축적과 착취의 형태는 계속 달라져 왔다. 그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찾으며 자본을 깊이 이해하기 시작해야, 자본주의로부터 멀어진 가장 다른 삶의 형태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대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 나설 때 마르크스의 구원은 시작될지 모른다.

‘북클럽 자본’은 6월부터 11월까지 전국의 동네책방들을 찾아 다니며 강연 투어를 한다. “드디어 쓰는 시간은 끝났고 이제 함께 읽고, 들을 시간이네요. 세상이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여러분도 저마다의 마르크스를 찾아보시길!”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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