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위해 존재하는, 하라는 대로 하는 포유동물처럼 느껴졌다." 2017년 아들을 출산한 한국계 미국인 캐서린 조는 출산 이후 극적으로 달라진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사라지고 ‘아기’만 남은 인생. 회복에 좋다는 미역국 대신 초밥을 먹고, 바깥 출입을 삼가라는 당부를 무시한 채 갓난 아기와 함께 장기 여행을 떠나는 ‘도발’로 가족이 강요하는 ‘전통’에 저항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는 결국 백일을 앞둔 아들의 눈에서 악마를 보는 지경에 이르러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한다.
극도의 정서 불안 등을 동반하는 산후정신증 경험담을 솔직하게 고백한 에세이 ‘네 눈동자 안의 지옥’이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다.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은 '내 얘기'라고 무릎을 치고,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은 모성 강요 문화에 진저리를 친다. 곽주현 창비 편집자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에서 우울감을 느끼지만, 산후우울증과 같은 ‘마더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여성 독자들이 더 반갑게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임신과 출산 과정을 여성들이 주어가 돼 여성의 시점에서, 여성의 언어로 기록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지금껏 임신, 출산, 육아 서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기 중심이었다. 태아의 성장과 발달을 시기별로 안내하고, 아이에게 좋다는 음식, 음악 등 태교 정보는 넘쳐났지만, 엄마의 상태에 주목하는 책은 드물었다.
‘여성의 몸’에 관한 담론이 쏟아질 때도 ‘임신한 몸’은 치고 들어오지 못했다. 페미니즘 서사가 활발해지며 ‘여성들의 말하기’가 일상이 됐지만, 임신과 출산은 비혼과 딩크족 트렌드에 밀렸다. ‘굴욕 없는 출산’을 펴낸 들녘의 선우미정 편집주간은 “엄마가 되기 위한 몸, 임신한 여성의 몸, 엄마였던 몸은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영역, 변두리로 취급됐던 측면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물꼬를 튼 건, 2019년 하반기에 출간된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문예출판사)와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휴머니스트)다. 두 책은 임신 이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여성의 신체적 변화를 관찰하고, 임신부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대해 신랄하게 성토한다. 현실에서의 임신과 출산은 숭고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다. 입덧, 배 뭉침, 어지러움 등 임신 이후 겪는 통증으로 죽을 만큼 아프다고 호소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태아는 건강하니 괜찮다' '엄마가 되려면 견뎌야죠' '너 혼자 애 낳느냐, 유난 좀 그만 떨어라'는 핀잔과 타박뿐이었다. 두 책은 모성 신화에 사로잡혀 엄마를 투명인간으로 지워내는 한국 사회의 전방위적 폭력을 까발린다.
“임신과 출산은 더 이상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담론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굴욕 없는 출산’의 저자 목영롱씨는 임신과 출산의 정치화를 역설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출산에 대한 이데올로기만 있고, 임신과 출산 지식에 대해선 전무한 게 가장 큰 문제”라며 “그러한 무지가 여성들을 더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목씨는 “임신부와 산모를 둘러싼 여성의 고통을 다루는 문제는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이를 외면한 채 ‘엄마 되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저출산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임신, 출산과 관련한 금기가 깨지면서 주변의 시선이 불편해 숨기기 바빴던 ‘난임’ 경험을 다룬 책들도 두드러지는 추세다. ‘우리 집에 아이가 산다’(랄라북스),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아우름)는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 등 아기를 갖기까지 난임 부부, 특히 여성이 감당하는 수년간의 힘겨운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며 ‘아이는 저절로 태어나는 게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