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 냄비, 프라이팬 들고 식당 찾는 사람들... "여기 담아주세요"

입력
2021.04.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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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대신 용기 낸 시민들… 
대형마트·프랜차이즈 응답할까

“손바닥이나 휴지만 아니면 된다고... 그래서 집에서 밥통 가져왔어요.”

서울 종로구에 거주하는 전한빈(24)씨는 지난달 케이크를 먹기 위해 10인용 밥솥을 챙겨 들었다. 집 근처에 있는 유명 케이크 가게가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을 거부하는 ‘노 플라스틱 카페’였기 때문이다. 조각 케이크가 아닌 홀케이크 담을 용기를 찾다보니 손에 잡힌 게 밥솥이었다. 나올 땐 주위 시선에 머쓱했지만, 카페에서 전씨의 밥솥은 결코 희귀하지 않았다. 냄비, 프라이팬, 오래된 접시 등을 당당히 들고 와 케이크를 담아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전씨는 “먹고 싶은 음식을 사먹으면서도 쓰레기를 최소화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이 가게를 알게 됐다”며 “이제 다른 식당에서 포장을 할 때도 내가 먼저 다회용기를 내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직접 챙겨온 용기에 음식이나 물건 포장을 부탁하는 이른바 ‘용기 내 캠페인’ 참여자가 늘고 있다.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특정 가게를 통해 다회용 포장을 경험한 소비자들이 일반 식당에서도 집에서 가져온 용기를 내미는 흐름이다. 그러나 일부 대형 마트나 프랜차이즈에선 플라스틱이나 일회용품 포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이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일부 상점에서 일반 식당으로 확대… 용기 내는 소비자들 덕분

전국으로 확산 중인 ‘노 플라스틱’ 가게들은 캠페인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최서인(24)씨는 지난해 봄 서울의 한 리필 상점에서 샴푸를 샀다. 가게에 있는 대형 샴푸통에서 샴푸를 채워 넣은 뒤, 다 쓰면 용기를 씻어와 다시 채우는 방식으로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였다. 곧 최씨의 리필 항목은 세탁세제, 섬유유연제, 탄산소다, 로션, 토너 등으로 늘어갔다. 이런 포장법에 익숙해지면서 식당에서도 조심스레 용기를 꺼내게 된 것이다. 최씨는 “마라탕 집에 처음 부탁해봤는데 사장님이 순간 당황하다가도 금방 갖고 온 그릇에 맞게 포장해주셨다”며 “좋은 일 한다며 음료를 서비스로 주거나 즉석에서 할인해 준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친환경 포장법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전국의 '노 플라스틱' 상점을 정리한 지도도 등장했다. 지도를 제작한 환경단체 '노프'의 활동가 김기훈(27)씨는 시민들의 캠페인이 일반 식당으로 퍼져나가는 게 반갑다고 했다. 김씨는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일반 가게들에도 다회용기 포장 문화가 퍼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지도 제작 목적이었다"며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매우 반가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용량 가늠할 수 있었으면” “대형 프랜차이즈도 앞장섰으면”… 눈 높아진 소비자들

캠페인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요구도 생기고 있다. 대표적인 게 "음식의 용량을 미리 알려주고 적절한 용기를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다. 1년째 캠페인에 동참 중인 직장인 A(25)씨는 “김치찌개 집에 너무 작은 통을 들고 가서 공기밥을 일회용기에 담아와야 했던 적도 있고, 반대로 너무 큰 통을 들고 가서 반찬이 굴러다닌 적도 있다”며 “일상적으로 캠페인에 참여하는 입장에선 식당들이 제공하는 각 메뉴의 양을 미리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생 노희수(25)씨도 “작은 식당들은 차치하더라도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미리 용량을 고지해놓을 수 있지 않으냐”며 “애써 용기를 들고 갔는데 일회용품을 쓰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업체보다 먼저 용량 고민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다. 대학생 김보경(24)씨와 고우준(25)씨는 식당을 검색하면 음식 용량과 적당한 용기를 추천해주는 애플리케이션(앱) '그린잇(GREEN EAT)'을 개발 중이다. 해당 앱은 지난해 단국대 사업단에서 주최한 전국 창업경진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김씨는 “시민들이 직접 음식 용량과 용기를 써넣을 수 있는 참여형 앱으로 발전시켜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용기 내 캠페인’ 유경험자들은 한목소리로 대형 마트나 생산 업체의 각성을 촉구한다. 영세 상점보다도 대형 업체들이 일회용 플라스틱 줄이기에 소극적인 탓이다.

이소연(27)씨는 지난 2월 설맞이 장을 보고 돌아온 어머니의 장바구니를 보며 속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평소 "생수병 나오는 것도 싫다"며 일일이 물을 끓여 드시는 어머니였지만, 대형 슈퍼와 시장에서 장을 봐야 하는 주부 입장에서 '노 플라스틱' 장보기는 의지만으론 불가능했다. 각종 식재료가 생산 단계에서부터 온갖 비닐과 스티로폼에 싸여 나왔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 캠페인이 더욱 성과를 내기 위해선 마트와 정부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3,5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는 취준생, 동네 슈퍼에서 장을 보는 주부, 퇴근길 대형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사는 직장인도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도 관심 갖고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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