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성공한 블라인드 압색…작성자 찾을 순 있지만 처벌은 '글쎄'

입력
2021.03.27 19:00
경찰, 블라인드 압수수색 두 번 시도 만에 성공
전문가들 "피의자 특정 가능, 처벌은 미지수" 
"처벌도 못하는데 강제수사? 보여주기식" 지적 
이용자들, 색출 불안감에 '흔적 지우기' 봇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조롱글을 수사 중인 경찰이 운영사 '팀블라인드' 사무실을 24일 압수수색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첫 압수수색에 실패한 뒤 일주일 만입니다.

당초 조롱글을 쓴 사람을 색출하겠다고 수사력을 동원한 데 대해 무리한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던 데다 한참 늦은 압수수색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결국 여론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수사가 아니었냐는 비판이 고개를 드는 분위깁니다. 블라인드 이용자들은 석연치 않은 강제 수사에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게시글을 지우고 탈퇴를 하는 등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직원으로 추정되는 블라인드 익명 이용자를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모욕죄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문제의 글 작성자는 9일 블라인드에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어차피 한두 달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다', '난 열심히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꿀 빨면서 다니련다' 등 글을 올려 국민들의 공분을 샀죠.

이후 경남경찰청은 고발 피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1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 블라인드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했습니다. 하지만 법인 등기부등본에 나온 주소에서 2㎞ 떨어진 곳에 실제 사무실이 있었던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허탕을 쳤죠. 제대로 된 사전 조사 없이 강제수사를 진행하다 헛걸음을 한 셈입니다.

경찰은 이후 주소를 확인하고 답사를 거쳐 압수수색 영장을 다시 신청한 뒤 일주일 만인 24일 블라인드 사무실 압수수색에 성공했습니다.

압수수색을 진행했던 경찰 관계자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고발이 들어왔기 때문에 수사가 불가피하고 수사를 위해선 피의자를 특정해야 한다"면서 "주소 파악에 착오가 있었지만 정상적으로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를 진행했고, 절차에 따라 진행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번의 시도 끝에 블라인드 사무실을 뒤진 경찰이 유의미한 자료를 확보했을까요.

블라인드의 개인정보처리 방침상 가입자의 개인정보 등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비스가 설계돼 있습니다. 서버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본사에 두고 있어요. 압수수색을 통해 수사에 쓸모 있는 어떤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죠.

다만 자료의 유무와 별개로 경찰이 글쓴이를 특정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합니다. 블라인드 측에서 자료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블라인드 가입 시 회사 메일로 주고받은 인증 코드 등을 통해 역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블라인드에 가입해 글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재직 중인 회사 이메일 계정으로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역추적 하기 위해 경찰은 17일 경남 진주의 LH 본사를 압수수색해 여러 부서에서 접속 기록 등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법조계 "직원 신원 파악 가능해도 처벌 어려워"

블라인드 내에서는 경찰이 대대적으로 강제 수사에 나선 것을 두고 부정적으로 보는 반응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해 26일 기준으로 관련 글 수십 건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불쾌하게 했다는 게 죄명이 되면 전 국민이 범죄자가 될 수 있다", "내부 징계용을 공권력이 나서서 수사한다", "몸통은 두고 희생양을 찾아 괘씸죄를 묻는 것" 등 노골적인 불만들이죠.

전문가들도 수사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이긴 마찬가집니다. 앞서 LH 측가 밝힌 고발 이유는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꿀 빨면서 다니련다', '꼬면 니들도 이직하든가' 등 허위 사실에 기반을 둔 자극적 내용의 글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LH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사태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한 회사 측 노력을 방해하는 점도 이유로 명시됐죠.

법조계에선 고발장에 명시된 혐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근거로 강제 수사 대상이 된 것이 의아스럽다는 반응입니다.

법무법인 지혁의 손수호 변호사는 "해당 글만 보면 명예훼손과 모욕의 피해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면서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국민 전체에 대한 명예훼손은 인정되지 않고 집합명칭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볼 수도 없어 실제 처벌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업무방해죄에 대해서도 "적어도 허위사실 유표 등 위계가 인정되어야 하고, 누구의 어떤 업무에 대한 방해 위험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은데 도대체 어떤 혐의에 대한 수사를 위해 영장이 발부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공분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이라는 판단만으로 수사에 경찰력을 투입해 강제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공분을 샀다고는 하지만 단순 조롱글에 대해 국무총리까지 나서 글쓴이 색출을 지시하고 수사 당국이 압수수색에 나선 것은 개인의 표현 자유를 침해하는 과잉 행정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죠.

허진민 참여연대 공익인권법센터 소장은 "익명성을 이용해 허위사실 유포나 욕설을 하는 등 행위는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블라인드라는 익명의 공간도 무법 지대가 될 수는 없다"면서도 "부적절한 발언과 불법은 엄연히 다른 문제인데 이번 건은 법 위반 여부가 명확지 않은 상황에서 밀어붙이는 과도한 수사"라고 꼬집었습니다.

허 소장은 또 "압수수색 영장이 있다고 해서 수사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면서 "여론을 의식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식으로 수사가 이뤄지면 국민 신뢰를 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불똥 튄 블라인드 이용자들, '흔적 지우기' 봇물

경찰 수사와 함께 완전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블라인드에는 집단 탈퇴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 그동안 썼던 글을 다 지우려고 한다"거나 "가입 흔적을 지우고 완전히 탈퇴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는 이용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처벌 유무를 떠나 블라인드 이용자를 특정하기 위한 수사가 진행되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은 분위기예요.

탈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밝힌 한 이용자는 "이 정도 조롱글을 문제 삼아 압수수색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면서 "공개되는 순간 탈주각(도망가야 할 상황)"라고 허탈해 했습니다. 다른 이용자도 "애초에 서비스 운영 정책과 어긋나는데 익명성이 보장 안 되면 누가 이용하겠냐"면서 "답답한 회사 생활에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는데 그나마 여의치 않아진 것 같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