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배터리가 '폭스바겐 쇼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물량의 30% 이상을 차지해 온 폭스바겐 그룹이 '각형' 통합 배터리셀로 전체 전기차 생산량의 80% 이상을 만들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파우치형'을 앞세운 K배터리가 기술표준 경쟁에서 밀리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우치형과 각형은 재료와 생산공정이 다르기 때문에 K배터리의 주력 타입을 각형으로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과거 기술 표준 경쟁 사례에서 K배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봤다.
23일 업계와 증권가에 따르면 폭스바겐그룹이 '파워데이'를 개최했던 지난 15일 이후 LG화학 주가는 이날까지 6거래일 동안 96만6,000원에서 77만5,000원으로 20% 가까이 폭락했다. 폭스바겐그룹은 LG화학의 배터리 자회사인 LG에너지솔루션의 가장 큰 고객사로 알려져 있다. LG화학뿐만 아니다. 미국 공장에서 폭스바겐에 배터리를 공급할 예정인 SK이노베이션 주가도 같은 기간 약 12%가 주저앉았고, 삼성SDI도 9%가량 빠졌다.
업계 안팎에선 K배터리 주가의 폭락은 '폭스바겐 쇼크'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을 내놓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완성차 업체와 전기차 스타트업은 물론 애플, 구글, 폭스콘 등 비완성차 업체가 전기차 사업에 진출할 경우 폭스바겐의 전기차 플랫폼인 'MEB'를 채택할 수도 있다"며 "각형 통합 배터리셀에 최적화된 MEB의 보급이 확대될수록 각형이 글로벌 기술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배터리 업계 이외에도 기술표준 경쟁을 통해 기업들의 명암이 엇갈린 사례는 적지 않다. 이 가운데 1980년대에 벌였던 비디오테이프 표준 경쟁이 대표적이다. 소니의 베타맥스 비디오카세트는 '기술의 우수성이 반드시 사업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경우다.
소니가 1975년 출시한 베타맥스 비디오카세트는 당시 경쟁사였던 JVC가 이듬해에 출시한 VHS 방식에 비해 화질 등 기술력에서 우위를 점했다. 처음엔 소니가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유율은 급반전됐다. 소니 회장이었던 아키오 모리타는 표준 기술을 배타적으로 운용한 것을 패인으로 꼽았다. 소니는 경쟁사에서 베타맥스 테이프용 VCR를 만들지 못하게 한 반면, JVC는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VHS용 기계를 만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VHS 기계를 구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배터리 업계 전문가는 "만약에 SK가 영업비밀 침해 소송 여파로 배터리 사업을 접을 경우 LG가 파우치형 시장을 독식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고객사인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단일 공급사에 의존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긴다"며 "중·장기적으로 파우치형 배터리를 만드는 업체가 많아야 완성차 업체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즉 현재 LG와 SK가 양분하고 있는 파우치형 배터리 생태계의 활성화가 최우선 과제라는 얘기다.
또 다른 사례는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의 웹브라우저 기술표준 경쟁이다. 인터넷 보급 초기 넷스케이프는 웹브라우저 시장의 선두주자였지만, 운영체제(OS) 시장을 틀어쥐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MS)가 IE를 무료로 끼워 팔면서 상황을 역전시켰다.
현재 K배터리는 시장점유율에서 앞서나가고 있지만,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과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앞세워 K배터리의 텃밭인 유럽시장 공략에 나서면서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중국이 MS처럼 판 뒤집기에 나선 것이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선 벤츠나 볼보 등 파우치형과 각형을 혼용하던 유럽 자동차 업체들도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생산 능력을 믿고 각형을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배터리 업계가 한국과 중국에 치여 자국 업체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K배터리 역시 현대차·기아에만 의존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전기차 태동기인 미국 시장은 중국이 쉽게 진출하기 어려운 만큼 중국의 파상 공세에 맞서려면 미국 시장을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