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번역 입고 세트로 출격…팬들에게 바칩니다, 이 ‘완전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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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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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고, 커서는 구하지 못한 세일러문 만화책을 완전판으로 만나다니! 발매일 카운트하며 디데이인 오늘 바로 예약구매 했습니다. 완전판으로 준비해주셔서 감사해요!”

최근 출판사 세미콜론에서 발행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완전판 세트(전10권) 온라인 서점 구매 페이지에 달린 독자 반응이다. 순정만화의 금자탑인 세일러문의 국내 최초 첫 완전판 출간 소식에 그 시절 순정만화 팬이었던 독자들이 술렁였다. 완전판만을 위한 새로운 표지 일러스트, 통상판의 2배 가까운 볼륨, 금박 로고, 홀로그램을 가공한 초호화 장정을 입힌 10권 세트 가격은 무려 16만5,000원. 그러나 출간 일주일 만에 초반 3,000세트 즉 3만 부가 매진됐다. 구매자의 63.3%는 애니메이션의 애청자였던 30대 여성이었다.

십 수권에 달하는 분량, 이에 상응하는 만만찮은 가격까지. 선뜻 구매가 쉽지 않은 ‘완전판’, ‘전집’이 출판시장의 새로운 활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자책과 오디오북처럼 책의 형태가 다변화되면서 종이책은 오히려 일부 독자를 위한 고급화 전략을 취하는 모양새다. 그중에서도 과거 인기를 끌었던 장르 문학이나 만화가 새 옷을 입고 어린 시절 해당 작품의 팬이었던 독자들의 지갑을 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최근 황금가지에서는 SF명작 ‘듄’을 양장본 전집으로 재출간했다. 과거 반양장 18권으로 출간됐던 것을 새로운 표지와 장정을 입혀 양장 6권 세트로 낸 것이다. 번역도 전면 개정했다. 6권 세트 가격이 12만 원에 달하는 이 책은 출간 며칠 만에 초판 3,000세트가 모두 소진됐다. 김준혁 황금가지 주간은 “2018년쯤 전자책 출간 당시 독자 반응이 좋아 수요가 충분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고전 SF작품에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반응이 쏟아질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고 전했다.

열성적인 팬덤은 구매뿐 아니라 출간 과정에서 숨은 주역으로 직접 활약하기도 한다. 최근 아르테에서 출간된 J.R 톨킨의 판타지 걸작 ‘반지의 제왕’ 60주년 기념판 완역 개정본의 번역 작업에는 반지의 제왕 국내 팬카페(‘중간계로의 여행’) 회원 5명이 함께 했다. ‘반지의 제왕’은 옥스퍼드대 영문학과 교수이자 언어학자였던 톨킨이 번역지침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로 작품 내 용어가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요소다. 이들 골수팬들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1991년 출간 당시 번역 오류들을 잡고 500여 개의 번역 용어를 새로 만들었다.

장현주 아르테 본부장은 “‘반지의 제왕’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톨키니스트’라 불리는 학구적이고 열성적인 팬덤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며 “이번 개정판 출간 작업 역시 1년 전부터 이들과 협업하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팬덤의 적극적인 개입에 힘입어 개정본은 지난 한 달간 예약판매에서만 1만 세트가 소진됐다. 출판사에서는 최소 4만 세트 이상이 판매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무리 팬덤이 공고하다 해도 새 장정에, 때로 번역도 다시 해야 하는 개정판 전집 출간은 출판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가는 작업이다. 때문에 사전 펀딩을 통해 독자 수요를 미리 가늠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1991년 국내에 ‘마계마인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큰 인기를 끌었던 미즈노 료의 판타지 소설 ‘로도스도 전기’는 최근 25주년 기념 신장판을 출간에 앞서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펀딩 시작 1시간 만에 목표 금액을 넘기고 최종 후원 금액 1억 원을 달성하면서 출간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었다. 신일숙 작가의 1986년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 역시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사전 북펀드에서 총 1억2,400만 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펀딩 금액을 달성하며 출간이 성사됐다.

박태근 알라딘 인문 MD는 “최근 레트로 붐에 힘입어 재출간되는 작품 대부분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향유되던 것들”이라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이었던 데다 저작권 개념도 미비했던 때라 제대로 된 경로와 판본으로 접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성인이 되어 제대로 즐기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MD는 그러면서 “이후 세대는 대부분 정식 발간된 작품을 접한 데다 종이책에 대한 향수도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이 같은 시장이 이후에도 지속되리라고는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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