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 뜬 미국판 '아나바다'..."시상식 드레스도 나눠요"

입력
2021.03.14 09:00
사지 않고 나누는 '바이 나씽' 그룹 SNS 통해 확산
코로나 고립 길어지며 공동체 온정 느끼는 수단으로
낭비 자원 회수되는 '순환 경제' 한 축으로 승화


'가장 멋있고 너그러운 이웃상' 수상자는 이 필수 노동자의 골든글로브 시상식 참석을 도운 '바이 나씽(Buy Nothing·아무것도 사지 말기) 어퍼이스트사이드 맨해튼 뉴욕' 페이스북 그룹입니다

2021년 골든글로브 시상식 엿새 뒤인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72~96가 주민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 그룹인 '바이 나씽 어퍼이스트사이드 맨해튼 뉴욕'에 검은색 드레스를 차려 입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이 같은 글이 올라왔다.

애나 버거(41)라는 이름의 이 여성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참석할 때 입은 드레스가 같은 페이스북 그룹 가입자인 한 이웃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골든글로브는 의료 종사자·교사·배달 노동자 등 사회 위험 최전선에서 일하는 필수 노동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들을 특별 관객으로 초대했다.

시상식에 초청 받은 델타항공 승무원 버거는 역시 이 페이스북 그룹 멤버인 메이크업 전문가에게 공짜 메이크업까지 받고 행사에 참석했다.

미국에서 조건 없이 이웃과 유무형의 선물을 나누는 '바이 나씽' 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더 이상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SNS를 통해 이웃에게 나눠 주는 미국식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다.

2013년 워싱턴주(州) 시애틀의 두 친구 레베카 록펠러와 리즐 클라크가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어 시작한 바이 나씽지난달 기준 전 세계 44개 나라에서 5,500개 그룹을 토대로 3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사회 운동으로 성장했다.

록펠러와 클라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조치 이후 자신들의 거주지에도 바이 나씽 클럽을 열어 달라는 요청이 전국에서 쇄도했다"고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에 밝혔다.

바이 나씽의 운영 방식은 간단하다. 이웃에 빌려 주거나 기증하고 싶은 물건을 자신의 거주지에 기반한 페이스북 그룹에 알리면 이를 원하는 회원들이 의사표시를 한다.

최근에는 참여 인원이 늘면서 주고받는 품목도 다양해졌다. 가구와 옷, 가전제품, 먹다 남은 식재료는 물론 버거의 사례처럼 시상식용 고급 드레스까지도 바이 나씽을 통해 구할 수 있을 정도다.


'코로나 집콕 생활'의 외로움 달래 준 '나눔'

록펠러와 클라크가 바이 나씽 프로젝트를 시작한 목적은 '낭비를 줄이면서 이웃과의 교류를 늘려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바이 나씽을 통해 공짜로 얻게 되는 물건의 가치보다 이웃 간 신뢰 구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 바이 나씽 운동이 이전보다 더 주목받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LA타임스는 "우리는 (코로나19로) 떨어져 지내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이웃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캘리포니아주 앨햄브라의 바이 나씽 페이스북 그룹 운영자인 제시카 시버스에 따르면 이 지역 바이 나씽 페이스북 그룹은 지난해 미국에서 코로나19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 회원 수가 10% 이상 늘었다.

시버스는 "코로나19로 몇 달 동안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며 "식료품 구하는 일을 비롯해 최근 바이 나씽에 많이 의지했다"고 밝혔다. 그는 "누군가는 햄을, 어떤 이는 채소를, 또 다른 이는 치즈를 줬다"며 "코로나19로 두려운 마음이 큰 요즘 같은 시기에 보살핌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강조했다.

2003년 문을 연 중고 물품 기부 사이트 프리사이클의 회원 수도 코로나19 확산 이후 부쩍 늘었다. 프리사이클 설립자 데론 빌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매주 1만 명이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프리사이클의 총 가입자는 900만 명에 이른다.

나눔의 혜택을 입은 이들뿐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의 물품을 보낸 이들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감을 전하고 있다. 자신의 집 한편에 이웃들이 옷을 무료로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운영 중인 미셸 셰어는 "주는 기쁨은 전염성이 있어서 더 베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LA 지역매체 KCRW에 밝혔다.

'성장보다 재생과 분배'... 주목 받는 '도넛 경제'

영국 일요 신문 옵저버는 10일 이 같은 서구식 '아나바다' 확산과 관련해 "차세대 경제 운동은 새로운 것을 전혀 사지 않는 것"이라는 분석 기사를 내놨다.

예컨대 환경 오염 주범으로 지목돼 온 패션업계가 최근 지속 가능성을 높이려 애쓰고 있는 게 바이 나씽과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일회용품처럼 신상품 출시 주기가 빨라 '패스트 패션'으로 불리는 H&M은 지난해 헌 옷을 새로운 패션 아이템으로 바꾸는 재활용 시스템 '루프'를 선보이고, 2030년까지 전 제품에 재활용이나 지속 가능한 소재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재활용을 통해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순환 경제'에 대한 관심은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시는 최근 민간 기업과 협약을 맺어 투명 페트병에서 재탄생한 재활용 섬유로 만든 의류와 가방 판매를 시작했다.

신문은 특히 "코로나19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취약한 세계 공급망,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인간과 자연의 충돌 등이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성장보다 재생과 분배를 핵심 원리로 삼는 '도넛 경제학'이 주목 받게 됐다"고 전했다.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2012년 주창한 도넛 경제 모델인간의 생존권과 복지, 평등, 정의, 생태, 지구환경까지 아우른다.

도넛 바깥 고리에는 기후변화 등 지구 생태적 한계선을, 안쪽 고리에는 사회적 기초를 표시해 인간과 세상을 함께 지키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표시한 것이다. 도넛 안은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사회적으로도 정의로운 공간인 셈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속 가능한 도시로의 변화를 위해 지난해 이 모델을 공공 정책 결정의 출발점으로 공식 채택하기도 했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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