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강요에 의한 이주노동자 계약서도 인신매매로 봐야”

입력
2021.03.09 15:17
“인신매매 방지법 용어 재검토하고 처벌 규정 구체화해야””

상대를 정서적·경제적으로 굴복시킨 상태에서 특정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했다면 납치나 감금 여부와 관계없이 인신매매에 해당,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국가인원위원회 의견이 나왔다. 직업이나 채무관계를 이용해 피해자를 자발적 노예처럼 만드는 '현대판 노예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는 해석이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발의된 ‘인신매매·착취방지와 피해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안(인신매매방지법)’에 대해 9일 검토의견을 내고, ‘UN인신매매방지의정서’에서 규정한 인신매매 개념을 가해자 형사처벌 단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5년 국회가 비준한 ‘UN인신매매방지의정서’에 따르면 △착취를 목적으로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사람을 모집하거나 이동하는 행위는 모두 인신매매에 해당한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인신매매가 성립한다는 것인데, 국내 형법은 그 동안 피해자의 자발적 의사가 존재하는 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아왔다.

인권위는 “납치, 물리적 폭력 등의 수단이 아니었더라도 사기나 기만 등을 통해 강제적 동의를 얻어냈거나, 채무적 관계를 이용해 굴복시켰을 경우 인신매매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계약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 소개업자의 강요에 못 이겨 한국어 근로 계약서에 서명했던 이주노동자 역시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위는 해당 법률안이 ‘(피해자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하는 행위’를 인신매매의 한 유형으로 규정한 부분에 대해서도 “’궁박한 상태’라는 용어가 경제적 형편의 의미로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외국인, 의사결정에 취약한 장애인 등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환경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UN인신매매방지의정서에 표현된 ‘취약한 지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는 지적이다.

인권위는 “(해당 법률안은) UN인신매매방지의정서의 인신 매매 개념을 국내법화했지만, 그 개념에 해당하는 모든 행위가 형사처벌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며 “인신매매 피해자를 조기에 발견해 보호·지원하고 인신매매를 예방·방지하기 위해선 유엔 의정서에 부합한 처벌 입법이 신속히 고려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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