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절단' 옥살이 70대 재심청구 기각… 재판부 "지금이면 감옥 안 갔을 것"

입력
2021.02.18 16:16
최말자 할머니 56년만의 용기 무위로
"무죄·정당방위 등 재심 요건 못 갖춰" 
재판부 “청구인 외침은 큰 울림과 영감"
여성단체 "검찰 변하는데 법원은 그대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물어 잘랐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했던 70대 여성이 56년만에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재판부는 기각 결정을 내렸지만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여성단체는 법원 결정에 강력 반발했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권기철)는 최말자(75)씨가 지난해 5월 청구한 재심 사건에 대해 기각 결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최씨는 18세였던 1964년 5월 자신을 성폭행 하려던 노모(당시 21세)씨에게 저항하던 과정에서 노씨의 혀를 물어 1.5㎝ 자른 혐의(중상해죄)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6개월이 넘는 옥살이도 했다.

최말자씨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1995년 발간한 ‘법원 100년사’에도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소개되면서 잘못된 판결의 사례로 지적됐다. 최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용기를 내서 여성단체에 도움을 청했고, 지난해 5월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씨는 재심 청구과정에서 혀가 잘린 노씨가 말할 수 있었다는 증거들을 제시하며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하거나 중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정당방위로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최근 자신을 강간하려는 30대 남성의 혀를 절단한 여대생에게 검찰이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혐의 처분을 내린 터라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란 기대가 컸다.

그러나 재심 재판부의 결론은 기각이었다. 재판부는 “최씨가 제시한 증거들을 검토한 결과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라고 볼 수 없다”면서 “당시 판결은 의사의 상해진단서 등 객관적 증거를 바탕으로 남성이 발음에 현저하게 곤란함이 있는 불구의 몸이 됐기 때문에 형법상 중상해로 인정한 것”이라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형법상 중상해죄 구성요건인 ‘불구’의 개념이 반드시 신체 조직의 고유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혀를 깨문 행위가 당시 재판에서 해석과 적용 과정의 오류 때문에 정당방위로 인정 받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심은 판결확정 후 새로운 증거가 있을 때 내리는 것이지 그 같은 이유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최씨는 재심청구 과정에서 “한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로 어린 소녀를 가해자로 낙인 찍어 감옥으로 보냈다”며 “헌법은 남녀가 평등하고 공정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는지 판사에게 묻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심 재판부는 기각 결정은 내렸지만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성차별적 인식과 가치관이 지금만큼이라도 열려 있었다면 ‘청구인을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 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린다”며 “재심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청구인의 외침이 우리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다란 울림과 영감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청구인 요청에 따라 성별이 어떠하든 모두가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여성단체는 법원 결정에 강력 반발했다. 배은하 부산여성의전화 소장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한 것”이라며 “최근 황령산 혀 절단 사건에서 검찰은 여성의 정당방위를 인정했는데 법원은 여전히 변화하지 않은 모습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 측은 항고장을 제출해 다시 한번 사법부 판단을 받아볼 계획이다.

부산= 권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