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라미란' 아니라 요즘 대세 염혜란 "이젠 마스크 써도 알아봐"(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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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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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라미란과 이정은에 주목했다면 올해의 주인공은 단연 염혜란(45)이다. 대기만성형 중년 여배우의 계보를 잇는 이 배우는 몇 년 전만 해도 배역 이름도 없이 ‘옆산모 엄마’ ‘가게 아줌마’ ‘우유 아줌마’ ‘면회자’ ‘유모’를 연기했지만 이젠 마스크를 써도 얼굴을 알아보는 유명인이 됐다.

염혜란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경이로운 소문’의 잇단 성공에 이어 이달에만 세 편의 개봉작으로 영화 관객과 만난다. 어딜 가도 ‘제2의 라미란이 되고 싶은 염혜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는 그는 이제 라미란도 인정할 만한 대세 배우로 떠오르고 있다. 10일 온라인 화상으로 만난 그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생의 그래프에서 지금 상승세인 것 같은데 노출이 많이 될수록 바닥이 드러나고 들통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면서 웃었다.

18일 개봉하는 저예산 독립영화 ‘빛과 철’은 염혜란이 ‘제2의 라미란’ 이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두 차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또는 잃다시피 한 두 여성이 사고로 산산조각 난 진실을 하나둘 마주하게 되며 겪는 심리 변화를 그린다. 그는 2년째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을 간호하며 가장 역할을 하는 영남을 맡아 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진실을 찾아내려 하는 희주(김시은)와 대립한다.

염혜란의 연기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파고든다는 점에서 인상 깊다. 영남은 깊게 패인 주름으로 고단한 일상을 드러내는 한편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무심한 듯 자연스레 펼쳐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대안적 사실’과 믿으려 하지 않는 ‘실체적 사실’의 쌍곡선 사이에서 갈등하는 복잡한 속내를 트라우마의 굳은 살 틈새로 드러낸다.

그는 “감정의 깊이를 따라가기 어려워 오래 간호한 분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많이 참고했다”면서 “실제로 그 인물이 살아서 내 연기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또 평면적이지 않고 단순하지 않게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이 늘 생생하게 표현되는 이유다. 염혜란은 "지독하게 매달렸다"는 이 영화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받았다.

그의 연기 경력은 20년이 넘는다. 2000년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극배우로 시작했다. 처음엔 ‘얼굴이 평범해서 캐릭터가 약하니 살을 찌워 개성을 키우는 게 어떠냐’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그런 염혜란을 봉준호 감독은 연극 무대에서 눈여겨보다 자신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 단역으로 캐스팅했다. 그의 첫 영상 매체 출연작이었다.

염혜란은 이후 매년 꾸준히 한두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정작 얼굴을 널리 알린 건 드라마에서였다. 2016년 ‘디어 마이 프렌즈’를 시작으로 ‘도깨비’를 거쳐 ‘동백꽃 필 무렵’으로 쐐기를 박았다. “제 연기 인생에 있어서 세 번의 큰 변곡점이 이 세 작품입니다. 영화에 비해 TV는 늘 멀게만 느껴졌고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죠. 그런데 TV에 출연하며 낯선 분에게 ‘연기 잘 봤습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몇 번 출연하지도 않았는데 매체의 힘이 이렇게 큰가 하며 놀랐죠. 예전엔 카페에서 조용히 대본 읽는 걸 좋아했는데 ‘동백꽃’ 하면서는 알아보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 또 한번 놀랐어요. ‘경이로운 소문’ 때는 마스크를 써도 알아보시더군요.”

염혜란에게 아직 최고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그에게 쏟아지는 시나리오들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 3, 4년은 정말 변화의 폭이 컸어요. 물리적 시간이 줄어들면서 평소 하던 걸 못하게 돼 연기까지 엉망진창 될까 두렵기도 합니다. 결국 초심이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 어떻게 인물들에 접근해 갔는지 다시 점검해 나가야겠죠. 결과보다 과정이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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