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절단 죄 안 돼" 경찰보다 정당방위 더 인정한 검찰

입력
2021.02.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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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본보 추적 보도 성폭행 사건
피해자가 되레 "중상해" 고소 당해
최말자 할머니 사건 맞물려 관심
검찰 "방어행위 위법성 없어" 결론
과잉방위 판단한 경찰보다 진일보
전문가들 "고무적 결론 큰 의미 있어"
피해자 "나 같은 사람 다신 안 나와야"

성폭행 사건 피해 여성이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면 정당방위로 인정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여성이 오히려 폭행 피해자가 되는 현실은 잘못된 게아닐까.

지난해 9월 한국일보는 이런 의문을 품고 그해 여름 부산에서 발생한 혀 절단 사건을 한 달 가까이 취재해 추적 보도했다. 한국일보 보도를 통해 성폭행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에게 적반하장식 고소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특히 성폭행 피해자가, 성폭행을 시도하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잘랐다는 이유로 형사처벌 받을 가능성이 제기되자, 여성계와 법조계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었다.

본보 보도가 나간 지 5개월이 지났고, 수사기관에서 의미 있는 결정이 나왔다. 검찰이 여성의 혀 절단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해 피해 여성을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민들의 법 감정에 상응하는 결과”라며 반색했다.


경찰보다 한 발 더 정당방위 인정한 검찰

부산지검 동부지청은 지난 9일 여성의 혀 절단 행위를 정당방위로 보고, 여성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여성이 남성의 혀를 깨문 것은 신체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결론 냈다. 혀를 잘린 남성이 여성을 중상해 혐의로 신고했지만, 죄가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7월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여대생 김수정(가명)씨는 생면부지의 30대 남성이 만취 상태인 자신을 차량에 태워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데려가 조수석에 청테이프로 묶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자 그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 혀를 잘린 남성은 당일 김씨를 중상해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고, 김씨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김씨의 혀 절단 행위가 검찰에서 정당방위로 인정받은 건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경찰은 김씨의 혀 절단 행위를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도, 형법 제21조 제3항을 적용해 정당방위가 아닌 과잉방위로 봤다. 제3항은 방어행위가 정도를 초과한 경우라도 그 행위가 야간에 발생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공포, 경악, 흥분, 당황으로 발생한 때에는 처벌하는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검찰은 경찰 판단보다 더 나아가 형법 제21조 제1항을 적용, 김씨의 행위를 과잉방위가 아니라 정당방위로 간주했다. 제1항은 ‘자기의 법익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다. 이무선 한세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여성을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결론은 같지만, 경찰은 혀 절단 행위를 위법성이 있다고 본 것이고 검찰은 위법성이 없다고 본 것으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남성, 청테이프 콘돔 소주 구매

혀가 잘리는 중상해를 입었다며 여성을 고소한 가해 남성은 지난 4일 검찰에 구속됐다. 그리고 닷새 뒤 강간치상 및 감금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됐다. 검찰은 “남성은 피해자를 강간하기에 앞서 강제로 키스를 했고, 피해자가 혀를 깨물자 미수에 그쳤다. 피해자는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고 설명했다.

검찰과 경찰 수사결과 남성은 술에 취해 부산 서면 거리에서 잠든 피해자를 발견하고 차에 태워 가던 중 편의점 등에 들러 청테이프와 콘돔, 소주를 구입했다. 경찰은 편의점 물건 구입 내역과 차량 블랙박스 음성 등을 토대로 남성이 청테이프로 여성을 조수석에 묶고 강간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병원 경남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장(사건 당시 부산남부서 여성청소년과장) 주도로 이뤄진 치밀한 수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뻔한 사건을 바로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검찰 관계자는 “경찰 조사가 굉장히 잘 된 상태로 넘어온 사건”이라고 말했다.

검찰 정당방위 인정ㆍ불기소에 “의미 있어”

전문가들은 정당방위를 인정한 검찰 결정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정춘숙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은 “그 동안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져온 걸 감안하면 새로운 장면이 열린 것”이라며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대응한 게 정당방위로 인정 받은 획기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김병수 부산대 법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정당방위 조항이 있었지만 그 동안 사문화되다시피 했다”며 “정당방위로 보호 받아야 할 국민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순생 부산여성의전화 상임대표도 “성인지 감수성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는 걸 보여주는 고무적인 일”이라며 “검사가 누구냐에 따라 판단이 바뀌는 일이 없도록 선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피해자 측은 수사기관 판단을 계기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 여성을 대리해온 법무법인 법과사람들의 우희창 대표변호사는 “수사기관에서 이런 해석을 내려주면 피해자들이 성범죄 초기 단계에서부터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며 “앞으론 방어행위를 정당방위로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해 입건 자체가 안 되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와 연락이 닿은 피해 당사자 김씨는 “가해자는 죄에 맞는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나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최말자씨 재심 사건에 영향줄까

검찰이 혀 절단 행위를 정당방위로 결론냄에 따라, ‘56년 만의 미투 사건’으로 주목 받은 최말자 할머니 사건의 재심이 열릴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최씨는 과거 성폭행 피해자였던 자신이 가해자 혀를 절단한 행위가 정당방위라며, 지난해 5월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씨는 1965년 자신을 성폭행 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형사처벌 받았다. 가해 남성이 최씨를 세 번이나 넘어뜨려 강제 키스를 하면서 강간을 시도했는데도, 혀를 깨문 최씨의 행위는 당시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했다.

채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