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왕실모독죄'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 정권 수호 넘어 국민 분열까지

입력
2021.01.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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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왕실모독죄’는 태국 정권의 ‘전가의 보도’였다. 지난해 7월부터 불 붙은 반(反)정부 시위를 탄압하는 도구가 된 것도 모자라 시민사회까지 둘로 쪼개 놨다. 그럴수록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개혁 요구는 거세지고 있어 태국의 정치적 혼돈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21일 방콕포스트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태국 디지털경제ㆍ사회부는 전날 반정부 단체 ‘진보운동’을 이끄는 타나톤 중룽르앙낏 전 퓨처포워드당(FFP) 대표를 왕실모독죄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타나톤 전 대표가 앞서 1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올린 “정권이 왕실 소유의 시암 바이오사이언스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생산 독점을 고의로 허용했다”는 글을 트집 잡은 것이다.

이번 고발은 태국 군부정권이 이제는 왕실모독죄 적용을 주저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19일엔 태국 1심인 형사법원이 SNS에다 군주제 비판 글을 29차례 게재한 60대 여성에게 무려 징역 43년 6개월을 선고하기도 했다. 타나톤 전 대표 고발도 앞서 짠오차 쁘라윳 총리가 “백신 관련 허위 정보 유포자에 대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이튿날 곧바로 이뤄졌다. 지금까지 반정부 시위 국면에서 왕실모독죄를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도 국제사회의 반발을 의식해 적용을 꺼려왔지만 더 이상 미루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을 한 셈이다.

왕실모독죄(형법 112조)는 최대 15년형을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복수 혐의로 나뉘어 기소된 경우 수십년 징역형도 부과할 수 있다. 현재 54명의 시위대가 왕실모독죄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으며, 핵심 지도부는 60년 이상 형량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강경 방침을 굳히자 여론 분열상은 한층 선명해졌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왕당파들이 ‘로열타이당’이라는 공식 정당까지 만들어 시위대에 맞서기로 한 것이다. 실제 로열타이당 수장을 맡은 와롱 전 민주당 의원은 전날 “군주제를 지키기 위해 시위대에 전쟁을 선포한다”고 공언해 극한 대립을 예고했다.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정권과 왕실이 오히려 왕당파에 편승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태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왕실 이슈가 정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에도 설립 허가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또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최근 봉사활동 현장에서 지지자들과 소통하는 등 은근히 왕당파 결집을 부추기고 있다.

민주화 세력 역시 정면 대결 의지를 다지고 있어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위대는 태국 내 코로나19 신규 확진 환자가 최근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만큼 내달 중순쯤에는 대규모 집회 재개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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