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49)가 미국으로 돌려보내질 위기에서 일단 벗어났다. 그가 자살을 시도할지 모른다고 영국 법원이 판단하면서다.
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BBC방송 등에 따르면 런던 중앙형사법원은 이날 어산지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범죄인 송환 요청을 불허했다.
재판부는 어산지 송환 요청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 등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는 어산지 변호인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또 어산지가 미국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리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어산지의 행동이 언론의 자유에 관한 거라는 변호인 측 주장에는 어산지가 탐사 저널리즘을 넘어서는 행위를 했다고 반박했다.
그런데도 재판부가 어산지의 미국 송환을 승인할 수 없다고 판결한 건 그의 미국 송환을 허용할 경우 그가 자살을 시도할 실질적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서다. 재판부는 어산지가 때때로 심각한 우울증과 함께 (정신발달 장애인) 아스퍼거 증후군과 자폐증 같은 증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2019년 5월 그의 감방에서 면도날이 발견됐고 어산지가 의료진에게 자살에 관한 생각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미국에서 어산지가 자살을 시도한다면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정신적 손상에 관한 이유로 송환을 제한키로 결정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어산지의 석방을 명령했다.
미 정부는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정식 항소는 14일 이내에 제기돼야 한다. 이에 따라 어산지는 계속 수감된다. 하지만 변호인 측은 이날 보석 신청을 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미국은 2019년 어산지를 방첩법(Espionage Act) 위반 혐의 등 18개 혐의로 기소하며 영국 측에 어산지의 송환을 요청했고, 영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정부와 어산지는 송환 여부를 놓고 영국 법원에서 다툼을 이어 왔다.
호주 출신인 어산지는 미군 브래들리 매닝 일병이 2010년 빼낸 70만건 규모의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보고서와 국무부 외교 기밀문서를 건네 받아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통해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 세계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어산지는 미국의 1급 수배 대상이 됐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인사 등 주요국 지도자에 대한 미국 정부의 비판과 평가 등이 담겨 있었다.
이후 어산지는 영국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에서 7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다가 2019년 4월 영국 경찰에 체포된 뒤 보석 조건 위반 혐의로 징역 50주를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런던에서 진행된 재판은 방첩법 위반 등 미국 정부가 기소한 어산지의 혐의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어산지 송환 요청이 적절한 것인지가 쟁점이다. 미국과 영국은 2003년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은 바 있다. 이날 법원의 어산지 송환 불허 판결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쳐 확정된다.
영국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에서는 이날 법원 결정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집권 보수당의 데이비드 데이비스 하원의원은 “어산지 송환이 가로막혔다는 것은 좋은 뉴스”라며 “정치적 기소를 위해 범죄인 인도 조약이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