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신과 함께’는 3년 전 기획돼 캐스팅을 앞두고 있다. 동명 영화 1,2편은 국내에서 각각 1,000만 관객을 동원했고, 대만과 홍콩 등 아시아 시장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방송가의 구애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인기가 더 치솟았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 해외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들이 ‘신과 함께’ 붙잡기 경쟁에 앞다퉈 뛰어들어서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최근 OTT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몸값이 올라갔고 더 유리하게 계약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영상산업의 화두는 넷플릭스였다. 최근 몇 년 새 국내 시장을 적극 공략하던 넷플릭스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날개를 달았다. 실내 활동이 늘면서 가입자 수를 크게 늘렸고, 블랙홀처럼 국내 드라마와 영화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올해 강적을 맞이한다. 디즈니플러스가 한국 진출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디즈니플러스는 넷플릭스의 대항마를 자처하며 2019년 11월 미국에서 서비스를 개시한 후 빠르게 세력을 넓혀왔다. 디즈니플러스의 한국행은 시작에 불과하다. 업계에서는 세계화를 꾀하는 미국 OTT HBO맥스와 애플TV플러스 등의 한국 진출은 시간 문제로 보고 있다. 올해는 한국 영상시장이 글로벌 OTT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는 첫 해인 셈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는 한국에서 가입자 수 확대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펼칠 전망이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한국 콘텐츠 확보라는 의견이 많다. 아시아 시장 공략에 있어 K드라마, K무비는 빼놓을 수 없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디즈니플러스는 당초 한국에서 자체 콘텐츠를 제작할 계획이 없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마블 시리즈 등만으로도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최근 한국 진출을 결정하면서 방침을 바꿨다. 지난해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된 드라마 ‘인간수업’과 ‘킹덤2’, ‘사랑의 불시착’ 등이 아시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모은 점이 자극이 됐다. 디즈니플러스는 국내 유명 영화사와 드라마 제작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디즈니플러스가 한국 서비스 개시에 맞춰 첫 선을 보일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무엇일지가 업계 관심사 중 하나다.
한국 진출을 선언하지도 않은 애플TV플러스는 배우 이민호를 주연으로 한 드라마 ‘파친코’ 제작에 이미 착수했다.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을 다룬 작품이다. 재미동포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한 영화인은 “한류 팬을 겨냥한 캐스팅인 동시에 한국 시장을 감안한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이외 OTT와의 협업을 염두에 둔 기획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영화 ‘범죄도시’(2017)의 강윤성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는 드라마 ‘카지노’다.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카지노를 배경으로 16회에 걸쳐 그릴 이 드라마는 제작비가 300억원 가량(1회당 20억원 안팎)이다. 1회당 제작비가 많아야 10억원 가량인 국내 방송사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기획이다. 제작사 BA엔터테인먼트의 장원석 대표는 “내용이 워낙 세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 국내 방송사 편성은 생각지도 않는다”며 “HBO맥스와 애플플러스TV처럼 국내 진출 가능성이 큰 OTT와도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글로벌 OTT의 한국 공략은 영상산업 지형을 뒤흔들리고 있다. 영화계는 코로나19로 극장 관객이 급감하면서 OTT로 시선을 급히 돌리고 있다.
‘카지노’를 기획한 BA엔터테인먼트는 원래 영화사다. ‘터널’(2016)과 ‘범죄도시’ 등을 만들었다. 최근 극장 수익 모델이 무너지면서 드라마로 눈길을 돌렸다. 글로벌 OTT를 겨냥한 ‘강남 밤의 제왕’과 ‘서울 이야기’ 등 드라마 2편을 추가로 준비 중이다. 영화사 월광은 넷플릭스와 드라마 ‘수리남’을 제작한다. 장원석 대표는 “코로나19 상황이 끝나도 극장에서 소화 가능한 영화 편 수는 이미 채워진 셈이라 드라마 제작으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장 대표는 “국내 방송사와 달리 영화 현장과 큰 차이가 없는 OTT의 드라마 제작 방식도 영향을 줬다”고 덧붙였다.
OTT는 방송권력의 정점을 차지했던 지상파방송사와 신흥 강자 종합편성(종편)채널 등을 밀어내고 새로운 지형을 그려나가고 있기도 하다.
유명 드라마 제작사 A는 지난해 새 드라마 기획안을 지상파 등 방송사 대신 넷플렉스에 가장 먼저 보냈다. 1회당 제작비가 최소 15억원이어서 지원에 파격적인 넷플릭스에 욕심을 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의 한류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매출 부담이 커진 탓이 컸다.
OTT는 제작 관행까지 바꾸고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방송이 주도하던 기존 방송 시장에선 외면했을 파격적인 내용의 드라마가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크리처물(괴물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 또는 드라마) ‘스위트홈’이 대표적이다. 한 낡은 서울 아파트 주민들이 각종 괴물에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다룬 10회짜리 드라마로 제작비 300억원이 들어갔다. ‘태양의 후예’(2016)와 ‘도깨비’(2017), ‘미스터 션샤인’(2018)을 연출한 스타 방송인 이응복 PD의 신작이지만 출연 배우 대부분은 신인이거나 무명이다. 기성 방송에선 스타 PD와 스타 작가, 톱스타 배우들이 손을 맞잡아도 300억원을 들이긴 쉽지 않다. 게다가 크리처물은 국내 소비층이 얇은 장르다. ‘스위트홈’은 국내 시장만 바라보고선 제작 자체가 실현되기 힘든 드라마다. ‘스위트홈’은 공개된 이후 국내 반응은 엇갈렸지만, 해외 10개국에선 넷플릭스 순위 1위에 올랐다. 이응복 PD는 “한국 드라마가 가진 소재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도전했다”며 “상상력을 갖고 연출에 매진할 수 있어 넷플릭스와의 협업이 좋았다”고 말했다.
‘인간수업’과 ‘킹덤’ 시리즈도 넷플릭스라서 제작이 가능한 드라마였다. ‘인간수업’은 청소년의 '조건 만남'이란 논쟁적 소재를 과감하게 다루며 10대 청소년의 그림자를 들췄다. ‘킹덤’ 시리즈는 좀비와 조선시대 궁중 암투를 결합시켰다. 기존 방송사에선 심의 문제로 다뤄지기 어려웠던 장르와 소재들이었다.
OTT로 장르적 실험이 이뤄지고 대중적 반향을 낳으면서 좀비는 드라마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SBS는 올해 상반기 '조선구마사'를 방송한다. TV에서 처음으로 선보여지는 '좀비 사극'이다. 디즈니플러스의 상륙 등으로 OTT시장이 더욱 커지면 한국 드라마의 장르 실험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란 기대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한류 스타를 둔 기획사의 콘텐츠 제작 고위 관계자는 “넷플릭스 등 OTT의 적극적 투자와 열린 작업 방식으로 인해 폐쇄적이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방송사와의 협업은 점점 후순위로 밀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OTT의 진격을 마냥 반길 수는 없다. 글로벌 회사가 막대한 자본으로 독점 계약을 하면서 국내 콘텐츠 시장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배대식 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국장은 "OTT 오리지널 콘텐츠는 대부분 판권을 독점하는 형태로 계약이 이뤄진다”며 “넷플릭스의 경우 국내 방송사보다 수익 보장 조건이 좋지만, 판권을 내주다보면 글로벌 자본에 국내 콘텐츠사가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 유력 영화사 대표 역시 “당장은 판권을 넘기고 목돈을 쥐는 것 같지만 해외에서 거둘 막대한 수익을 포기하는 꼴”이라며 “콘텐츠에 따라 수익을 배분 받을 수 있는, 차별화된 계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OTT를 계기로 방송가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고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배우 출연료가 치솟는 점도 부작용으로 꼽힌다. 한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국 PD는 “드라마 조연으로 나왔던 20대 배우 소속사에서 1회당 출연료로 2억원을 요구해 당황했다”며 “앞으로 출연료 상승이 제일 걱정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1회당 출연료 2억원은 2년 전만해도 이병헌 등 극히 일부 톱스타들이 드라마에 출연할 때 거론되던 금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