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소비자들의 행동반경이 급격히 쪼그라들면서, 이들의 구매력을 기반 삼았던 전통 상권 지형이 구조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외출이 줄고 대신 근거리 쇼핑이 잦아지자, 거주지역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닐 만한 거리에 있는 이른바 '슬세권(슬리퍼+세권)'이 빠르게 성장하는 게 대표적이다. 상권의 중심축이 유흥가나 도심에서 주택 밀집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은 전국에 퍼져 있는 편의점 매출에서 실제로 확인되고 있다.
21일 국내 대표 편의점 브랜드 A사의 전국 주요 상권 100개 점포씩을 무작위 샘플 채취해 올해 1~11월 매출을 살펴본 결과, '주거지역' 상권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8% 증가했다. '오피스지역' 상권은 증가율이 1.1%로 지난해와 비슷했다. 반면 '대학가 유흥지역' 상권은 6.2% 떨어졌고, 리조트나 관광단지 등 '여행지역' 상권은 8.4%나 급감했다.
이는 코로나19 이전 상권 지형도와 정반대다. 편의점 매출도 유흥지와 관광지, 대학가 등에서 높았기 때문에 이 지역 상권 점포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올해는 동네 상권 점포 매출이 더 좋다는 게 편의점 업계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마트24 관계자는 "2단계, 2.5단계 등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격상될 때마다 주택가 점포 매출이 확 늘어나고 있다"며 "반면 유흥가나 학원가, 대학교 인근은 타격을 많이 받았다"고 설명했다.
업계는 편의점에서의 구매품목 변화도 주목한다. 일상적인 장보기 수요가 점차 편의점으로 옮겨오는 양상이 확인되면서다. 온라인 주문 후 배송을 기다리거나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어 비교적 동네 외곽에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수요까지 편의점이 흡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달 14~20일 GS25에서 전주 대비 매출 신장률이 가장 높은 품목은 신선식품에 해당하는 과일과 채소(45.6% 증가)였다. 쌀, 잡곡 등 양곡이 34.8%, 축수산도 34.0% 늘었다.
CU(12월 8~20일 저녁 9시~아침 9시 기준)에선 보통 대형마트에서 사는 고추장 등 장류 22.1%, 양념류 20.2%, 식용유 21.0%, 밀가루 등 가루류 매출이 17.2%씩 뛰었다. 이마트24의 올해 전체 매출 분석에서도 채소, 조미료가 72%, 67%씩 증가한 가운데, 봉지면 매출 증가율(33%)이 컵라면(10%)을 뒤집었다.
유통업계는 오프라인 상권이 집 근처로 집중되는 흐름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만물상 식으로 판매 품목을 다양화하거나 매장 위치를 옮기는 대응에 나서고 있다.
요즘 편의점이 배송은 기본이고 가전제품, 의류 및 화장품, 명품까지 진열하는 건 동네 상권 강세에 올라 타려는 전략이다. 이웃 주민끼리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당근마켓은 최근 세탁 서비스를 추가한 데 이어 향후 청소, 가사도우미 등 동네 구인·구직 서비스까지 넓힐 예정이다.
이른바 슬세권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나아간다는 방침이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이케아는 서울 성수동에 작은 버전의 '이케아 랩'을 여는 등 도심 접점형 매장을 늘리는 추세다.
CU를 운영 중인 BGF리테일 관계자는 "유례없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소비자 생활 반경이 좁아졌고, 유흥가나 여행지를 비롯해 공항 등 특수상권에서 집 근처 근거리 쇼핑으로 넘어오는 흐름이 확실히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