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는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새 환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전 국민에게 접종할 백신을 확보하며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한 상태다. 오는 28일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도 다소 완화해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인구 570만명의 도시국가가 이처럼 코로나19 국면에서 주목 받을 수 있던 건 선제적인 백신 확보 노력과 장기간에 걸친 투자가 맞물린 결과다. 백신 배포 일정조차 감감무소식인 한국과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21일(현지시간)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싱가포르는 앞서 14일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화이자 백신을 승인했다. 싱가포르 당국은 연내 백신 접종을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리셴룽(李顯龍ㆍ68) 총리는 이날 대국민 담화에서 “내년 3분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백신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모든 국민과 장기 거주자에게 백신이 무료로 제공될 것”이라고 밝혔다.
싱가포르가 백신 확보와 접종에 속도를 내고는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처럼 확진ㆍ사망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은 아니다. 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 집계에 따르면 오히려 싱가포르의 확진자 수는 8월 이후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 해외 유입 사례를 제외하면 신규 감염이 제로(0)에 가깝다.
20일 싱가포르 방송 채널뉴스아시아(CNA)는 이날 19명의 신규 감염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는데, 모두 해외 유입으로 지역사회 감염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28일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절차 3단계(phase 3)로 진입한다. 이 경우 교회나 공공기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 제한이 완화되고 대형 쇼핑몰에 대한 규제도 느슨해질 전망이다.
이 같은 ‘장밋빛 소식’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정부는 발 빠르게 화이자 백신 확보에 나섰다. 여기에 더해 미국 모더나와 중국 시노백이 개발한 백신을 포함, 여러 백신 후보에 대해 선구매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도 조기 지불한 상태다. 이를 위해 10억싱가포르달러(약 8,180억원)라는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했다.
리 총리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부터 정부는 무대 뒤에서 조용히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여러 제약사들과 임상시험 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계약했고, 일부는 싱가포르 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일찌감치 준비한 만큼 남들보다 빠르게 백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는 “백신을 신속하게 확보할 수 있던 것은 범정부의 노력도 있었다”며 여러 부처와 관료들을 ‘보이지 않는 영웅’이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우수한 글로벌 물류 시스템도 코로나19 국면에서 빛을 발했다. 화이자 백신은 영하 70도에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초저온 유통망 확보와 빠른 배송이 필수다. 리 총리는 “DHL, UPS, 페덱스 등 세계 유수의 화물운송 회사가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있고, 창이공항 등 지상조업사들도 의료 물품을 운송할 수 있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인증을 받았다”며 “수년간 계획하고 투자 환경을 조성한 것이 결실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닷새 연속 1,000명 넘게 나오며 감염병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음에도 여전히 백신 확보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한국의 형편과 대조적이다. 우리 정부는 내년 2~3월 노인, 의료인 등 필수 접종 인원을 대상으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부터 접종한다는 방침이지만, 이 백신의 구체적 도입 시기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화이자, 모더나 백신의 국내 도입 여부도 여전히 안갯속이다.
백신 확보 역시 거북이걸음을 보이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전날 ‘KBS 일요진단’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코로나19 백신 확보가 늦어진 이유와 관련, “정부가 백신 도입 논의를 시작할 당시 확진자 수가 적었기 때문에 백신 의존도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부가 백신 태스크포스(TF)를 만든 7월만 해도 국내 하루 신규 확진자가 100명대에 그쳤던 만큼 급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과 오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재웅 전 쏘카 대표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리 총리의 대국민 담화를 언급하며 “한국이 ‘백신전쟁’에서 밀려난 이유는 결국 리더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백신이나 코로나 위기극복보다는, 설익은 K-방역의 성공과 수출과 대기업 위주의 경제성장률 숫자에 도취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은 리더의 잘못된 판단이 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